본관은 전주(全州). 아버지는 사도세자(思悼世子)이며, 어머니는 숙빈임씨(肅嬪林氏)이다. 10세에 은언군(恩彦君)의 작호(爵號)를 받고, 13세에 유학 송낙휴(宋樂休)의 딸과 혼인하였다.
1771년(영조 47) 외람되게 근수(跟隨: 벼슬아치를 따라 다니는 관아의 하인)를 많이 거느리고 남여(藍輿)를 타고 다닌다 하여 동복형제인 은신군(恩信君)과 함께 관직에 서용되지 못하는 처분을 받았다. 곧이어 시전(市廛) 상인들에게 수백 냥의 빚을 갚지 않은 것이 영조에게 발각되어 은신군과 함께 직산현(稷山縣)에 유배되었다가, 곧 제주도 대정현(大靜縣)에 안치되어 3년만에 풀려났다.
영조가 죽자 수릉관(守陵官)에 임명, 그 공으로 1777년(정조 1) 가자되어 흥록대부(興祿大夫)에 올랐다. 그런데 당시 홍국영(洪國榮)이 정조의 비 효의왕후(孝懿王后)가 후사가 없자 누이동생을 빈[嬪: 원빈(元嬪)]으로 들여 왕세자를 낳게 하려 하였으나 1780년(정조 4)에 죽자, 대신에 은언군의 맏아들인 이담(李湛)을 원빈의 장례 때에 대존관(代尊官)을 시켜 양자로 삼았다. 그리고 완풍군[完豊君: 완(完)은 왕족의 본관인 완산(完山)을 가리키고 풍(豊)은 홍국영의 본관인 풍산(豊山)을 가리키며 후에 상계군(常溪君)으로 개칭함]이라 부르면서 가동궁(假東宮)이라 하여 왕위를 잇게 하려는 계책을 세웠다.
그리하여 홍국영이 쫓겨나 병사한 뒤로도 일당이 계속 역모를 꾸미다가 일이 탄로될 우려가 있자, 1786년(정조 10) 상계군 이담을 독살시키고 말았다. 이 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은언군도 연루되어 죽을 뻔했으나, 정조가 대신들의 요구를 뿌리치고 유배지라 할 수 없는 강화도에 처자와 함께 유배시켜 계속 물의를 빚었다.
1789년(정조 13) 강화도에서 탈출했으나 곧 붙잡혀 강화도에 다시 안치되었다. 그 뒤로도 벽파대신(僻派大臣)들과 왕대비 정순왕후(貞純王后)로부터 역모의 화근으로 지목되어 끊임없이 생명의 위협을 받았으나 정조의 비호로 무사하였다. 그러나 정조가 죽고 나이 어린 순조가 즉위해 정순왕후가 수렴청정 하자 상황이 바꿔, 1801년(순조 1) 신유사옥 때 처 송씨(宋氏)와 며느리 신씨(申氏: 이담의 처)가 청나라 신부 주문모(周文謨)로부터 영세받은 사실이 발각되어 도주하다 붙잡혀, 송씨 · 신씨와 함께 강화도에서 사사(賜死)되었다.
1849년(헌종 15) 손자인 덕완군(德完君)이 철종으로 즉위하자 곧 작위가 복구되었고, 그 해 대왕대비 순원왕후(純元王后)의 명으로 은언군가의 역모에 관한 일을 적은 모든 문적(文蹟)이 세초(洗草)되었다. 1851년(철종 2)에는 대제학 서기순(徐箕淳)에 의해 신유사옥 때 은언군의 무죄를 변증하는 주문(奏文)이 지어 올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