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조선 후기에, 은언군에 봉해졌으며, 맏아들 이담이 세도정권을 노린 홍국영의 양자가 되어 역모죄로 연루된 종실.
개설
생애 및 활동사항
영조가 죽자 수릉관(守陵官)에 임명, 그 공으로 1777년(정조 1) 가자되어 흥록대부(興祿大夫)에 올랐다. 그런데 당시 홍국영(洪國榮)이 정조의 비 효의왕후(孝懿王后)가 후사가 없자 누이동생을 빈[嬪: 원빈(元嬪)]으로 들여 왕세자를 낳게 하려 하였으나 1780년(정조 4)에 죽자, 대신에 은언군의 맏아들인 이담(李湛)을 원빈의 장례 때에 대존관(代尊官)을 시켜 양자로 삼았다. 그리고 완풍군[完豊君: 완(完)은 왕족의 본관인 완산(完山)을 가리키고 풍(豊)은 홍국영의 본관인 풍산(豊山)을 가리키며 후에 상계군(常溪君)으로 개칭함]이라 부르면서 가동궁(假東宮)이라 하여 왕위를 잇게 하려는 계책을 세웠다.
그리하여 홍국영이 쫓겨나 병사한 뒤로도 일당이 계속 역모를 꾸미다가 일이 탄로될 우려가 있자, 1786년(정조 10) 상계군 이담을 독살시키고 말았다. 이 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은언군도 연루되어 죽을 뻔했으나, 정조가 대신들의 요구를 뿌리치고 유배지라 할 수 없는 강화도에 처자와 함께 유배시켜 계속 물의를 빚었다.
1789년(정조 13) 강화도에서 탈출했으나 곧 붙잡혀 강화도에 다시 안치되었다. 그 뒤로도 벽파대신(僻派大臣)들과 왕대비 정순왕후(貞純王后)로부터 역모의 화근으로 지목되어 끊임없이 생명의 위협을 받았으나 정조의 비호로 무사하였다. 그러나 정조가 죽고 나이 어린 순조가 즉위해 정순왕후가 수렴청정 하자 상황이 바꿔, 1801년(순조 1) 신유사옥 때 처 송씨(宋氏)와 며느리 신씨(申氏: 이담의 처)가 청나라 신부 주문모(周文謨)로부터 영세받은 사실이 발각되어 도주하다 붙잡혀, 송씨 · 신씨와 함께 강화도에서 사사(賜死)되었다.
1849년(헌종 15) 손자인 덕완군(德完君)이 철종으로 즉위하자 곧 작위가 복구되었고, 그 해 대왕대비 순원왕후(純元王后)의 명으로 은언군가의 역모에 관한 일을 적은 모든 문적(文蹟)이 세초(洗草)되었다. 1851년(철종 2)에는 대제학 서기순(徐箕淳)에 의해 신유사옥 때 은언군의 무죄를 변증하는 주문(奏文)이 지어 올려졌다.
참고문헌
- 『영조실록(英祖實錄)』
- 『정조실록(正祖實錄)』
- 『순조실록(純祖實錄)』
- 『철종실록(哲宗實錄)』
- 『명의록(明義錄)』
- 『운석유고(雲石遺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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