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대기(大紀). 생원 홍만형(洪萬衡)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홍중해(洪重楷)이고, 아버지는 홍양보(洪良輔)이며, 어머니는 심척(沈滌)의 딸이다. 영의정 홍국영(洪國榮)의 할아버지이다. 이재(李縡)의 문인이다.
1728년(영조 4)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뒤 검열을 지냈고, 1731년 한림으로서 왕이 부른 자리에서 시정기(時政記)에 대하여 아뢰었고, 이듬해 봉교, 1733년 이조좌랑을 거쳐 지평이 되고 이듬해 정언이 되었다.
1735년 신치운(申致雲)이 권상하(權尙夏)를 날조하여 무고하는 것을 탄핵하였다가 임금의 뜻에 거슬려 파직되고, 1736년 다시 정언에 오르고 이듬해 수찬이 되었다. 같은 해 김성탁(金聖鐸)을 보호했다 하여 조현명(趙顯命)을 탄핵하다 파직되었다.
같은 해 다시 교리가 되었고, 1738년 서해어사로 나가 봉산군수 조윤성(曺允成)의 선정을 추장(推奬)하여 승자(陞資)하도록 복명, 청원하였다.
이듬해 경성판관이 되고, 다시 이조좌랑이 되었다. 1740년 2월 이조좌랑이 되었고, 6월 효종의 시호 가상시 도청의 공로로 가자되었다가 지나치다는 대신들의 주청으로 환수되었다.
그 뒤 집의·응교를 거쳐 1741년 사간·겸보덕·겸필선이 되고, 1742년 검상이 되었다. 같은 해 수원부사가 되고, 1745년 전라도관찰사가 되었다. 시문에 능하였고 글씨를 잘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