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권 24책. 목판본. 1404년(태종 4) 아들 종선(宗善)에 의해 간행되었다.
≪동문선 東文選≫ 권9에는 ≪목은집≫ 70권이란 기록이 있어 전래본과 다른 판본이 있지 않나 하는 의문을 가지게 한다. 그러나 ≪태조실록≫ 5년 6월조 이색 졸기(卒記)에는 55권이라는 기록이 있는 점으로 보아, ≪목은집≫은 처음에 55권으로 편찬되었지만, 1404년 간행 과정에서 종선에 의해 다른 유문(遺文)을 보충하면서 내용이 증감되고, 권질과 차서가 달라졌기 때문에 이러한 기록의 차이가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런데 위의 졸기 중에는 ‘행우세(行于世)’라는 글이 있어, 1404년 간본과 다른 판본 또는 사본이 선행하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되기도 한다. 이 점은 1401년(태종 1) 서울에 왔던 명나라 사신 장근(章謹)이 ≪목은이색문집≫을 청했을 때 조준(趙浚)이 “온전한 간본이 없다.”고 답한 것으로 보아, 이때까지 ≪목은집≫은 자료수집 단계가 끝났으나, 미완성 상태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404년에 간행된 이 책은 13년간 세상에 유포되었지만, 1417년 음양참위서(陰陽讖緯書)를 금하는 율령이 내려지자 이색의 문집도 수거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 책은 음양금기에 관련되었기보다는 조선왕조의 세계(世系)에 관한 기록을 담고 있었기 때문에 금기서로 수거된 듯 하다.
이색의 시·문은 방대한 양일 뿐 아니라, 간행하기 어렵기 때문에 시와 문을 갈라서 따로 간행하기도 하였다. 즉, 후손 계전(季甸)이 오언·칠언 고(古)·율시를 선별, 분류해 ≪목은시정선 牧隱詩精選≫ 6권을 편찬하고, 서거정(徐居正)의 서문을 붙여 후손 봉(封)에게 간행하게 한 판본이 현재에도 전하고 있다.
또한 문만을 모아 ≪목은문고 牧隱文稿≫ 18권은 1583년 홍주목사 최흥원(崔興遠)이 간행한 바 있다. 그 뒤 임진왜란을 겪고 난 뒤, 거의 유전되지 않는 상태였으므로 다시 후손 덕수(德洙)가 1626년(인조 4)≪목은집≫을 간행했고, 다시 1686년(숙종 12) 대구에서 활자본으로 간행한 바 있다.
이 책은 전술한 바와 같이 시문류와 산문류를 엄격히 구분해 편집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권수에 권근(權近)·이첨(李詹)의 서문, 연보·교서(敎書)·행장·신도비명(神道碑銘) 등이 수록되어 있으며, 시고목록(詩稿目錄)과 문고목록(文稿目錄)이 별책으로 구분, 정리되어 있다.
시고 권1∼35까지는 사(辭)·조(操)·소부(小賦) 그리고 시 8,000여수가 수록되어 있다. 시는 양과 질에서 고려조에 유일한 대가로 평가할 만하다. 시에서는 근체·고체·오언·칠언 등 각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고 있으며, 악부체(樂賦體) 또한 후인이 미치지 못할 만큼 절묘하게 구성하고 있다.
문고 권1∼6에 기(記) 75편, 권7∼9에 서(序) 39편, 권10에 설(說) 21편, 권11∼13에 표(表) 22편, 찬(讚) 11편, 잠(箴)·전(箋)·변(辨)·작(作)·후(後)·발(跋) 등 33편, 권14∼20에 비(碑)·명(銘)·전(傳) 등 35편이 수록되어 있다.
이색의 문장은 시와 같이 중국에서 한림(翰林) 벼슬을 한 경력과 능력으로 육경(六經)과 제자서(諸子書)를 두루 구사, 원용했으며, 변려문(騈儷文)보다는 산체(散體)를 잘 지었다.
이색의 시문은 문학 작품으로서 높은 가치를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여말의 지식인 사회와 정치 상황을 알아보는 사료로서도 귀중하다.
문고 권20의 기·서·표·전 등은 당시 이색이 교유한 지식인과 정치 담당자들의 전기적 자료가 대부분이다. 정치·사회에 관한 원천적 사료라 할 수 있다. 이미 ≪고려사≫의 기본자료로 활용된 바 있다.
이색은 스스로 불교와는 인연이 없다고 말하기도 했지만, 많은 사찰기, 승려들의 비문 등은 이색의 교우관계에 대한 폭을 알게 한다. 이 기록들은 불교에서 유교로 전향되는 과도기적인 사상의 일면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