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순조 때 창작된 향악정재(鄕樂呈才)의 하나. 사선은 신라 때 수려한 산수를 찾아다니며 학문과 마음을 닦던 영랑(永郎)·술랑(述郎)·안상(安祥)·남석행(南石行)을 가리킨다.
금강산에는 무선대(舞仙臺)가 있는데, 이곳에서 네 사람이 취무(醉舞)하였다는 고사가 있다. 이 춤은 순조 때, 옛날의 사선이 와서 놀 만큼 태평성대라는 내용의 노래를 지어 부르면서 추던 춤이다.
예제(睿製:왕세자나 왕세손이 글을 지음)로 되어 있는 이 창사(唱詞)의 첫 부분은 다음과 같다. “어화 성대(盛代)로다. 해동금일(海東今日) 성대로다. 나대(羅代)에 노던 사선이 이제와 다시 노니 봉래(蓬萊)로 오시는가, 영주(瀛洲)로 오시는가.” 이와 같은 창사(唱詞)를 가곡 중의 편가락에 맞추어 노래부른다. 이 춤은 여기(女妓)의 춤과 무동(舞童)이 추는 두 가지가 있다.
무원(舞員)은 6명으로, 2명은 각기 연꽃 한 가지씩을 두 손에 들고 앞에서 일대(一隊)를 짓고, 4명은 꽃을 들지 않고 그 뒤에서 이대(二隊)로 짝을 지어 북쪽을 향하여 춤을 춘다. 이 춤의 반주로 쓰이는 음악은 <향당교주 鄕唐交奏>이다.
1829년(순조 29)의 ≪진찬의궤≫에 따르면 여기의 복식은 화관을 쓰고, 초록단의(草綠丹衣)·황초단삼(黃綃單衫), 속은 남색상(藍色裳), 거죽은 홍초상(紅綃裳)에 홍단금루수대(紅緞金縷繡帶)를 띠고, 오채한삼(五彩汗衫)을 매고 초록혜(草綠鞋)를 신는다.
무동의 복식은 1829년 야찬(夜饌) 때의 복식이 무고(舞鼓) 복식과 같다고 하였으므로, 복두(幞頭)를 쓰고, 남포(藍袍)·백질흑선중단의(白質黑縇中單衣)에 홍야대(紅也帶)를 띠고 흑화(黑靴)를 신었음을 알 수있다. 이 춤이 실려 있는 무보로는 ≪정재무도홀기 呈才舞圖笏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