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화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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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학궤범 4권(20) / 육화대
악학궤범 4권(20) / 육화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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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조선 초기의 당악정재(唐樂呈才)의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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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초기의 당악정재(唐樂呈才)의 하나.
내용

조선 초기의 당악정재(唐樂呈才)의 하나. ≪고려사≫악지에는 보이지 않고, ≪악학궤범≫과 ≪정재무도홀기≫에 그 춤의 절차가 전한다. 따라서 성종조 이전에 창제된 것으로 추정되며, 그 뒤 400여 년 동안 보이지 않다가 1901년 7월의 진연(進宴)에서 재연되었다.

당악정재이므로 의장대와 죽간자(竹竿子)를 갖추고 있다. 춤은 치어인(致語人), 즉 화심(花心)인 중심무 1명과 죽간자 2명, 육화(六花)를 상징하는 무원 6명 등 모두 9명으로 구성된다.

≪악학궤범≫에 따르면 동쪽에는 홍의(紅衣) 3명, 서쪽에는 남의(藍衣) 3명으로 갈라서 각각 <일념시 一念詩>·<이념시 二念詩>·<삼념시 三念詩>를 번갈아가며 차례로 부른다. 그런데 ≪정재무도홀기≫에 의하면, 동서 6명의 옷 빛깔이 각각 다르다.

즉, 동쪽 3명은 옥색의·자적의(紫赤衣)·양람의(洋藍衣)이고, 서쪽 3명은 초록의·진홍의·분홍의의 순으로 여섯 가지 꽃의 빛깔을 상징한다. 또, <일념시>에서 <삼념시>까지의 노래는 ≪악학궤범≫에서 칠언율시를 불렀는데, ≪정재무도홀기≫에서는 원래대로 칠언율시를 부른 다음 번역시를 또 한번 부른다.

번역한 일념시는 가곡의 <농락 弄樂>과 <계락 界樂>에 맞추어 부르고, 이념시와 삼념시는 각각 편(編) 가락에 맞추어 부르는 점이 다르다. 춤을 추는 방법은 먼저 죽간자가 문화심사(問花心詞)를 부르면 치어인이 화심답사(花心答詞)로 대답하는 문답식의 이색적인 화창(花唱)으로부터 시작된다.

이와 같이 동서로 나누어 서서, 동편의 홍의 중 첫째가 꽃을 들고 나와 <일념시>를 부르면, 서편의 남의 중 첫째가 꽃을 들고 나와 역시 <일념시>를 이어 부른다. 계속해서 동서의 둘째 무원이 차례로 나와 <이념시>를 부르고, <삼념시>로 이어 꽃사설을 노래하고 아름다운 꽃춤을 보인다.

춤의 방위는 동서에서 남북으로 바뀐다. 즉, 홍의는 북쪽 건(乾)·감(坎)·간(艮)에 서고, 남의는 진(震)·이(離)·곤(坤)의 위치에 서서 회무(回舞)·협수무(挾手舞)·퇴수무(退手舞) 등을 춘다.

음악은 ≪악학궤범≫에는 <천년만세인자 千年萬歲引子>·<최자령 嗺子令>·<중강령 中腔令> 등 당악만을 사용했고, ≪정재무도홀기≫에는 <보허자령 步虛子令>(향악화된 곡)·<향당교주 鄕唐交奏> 및 가곡 중의 <농락>·<계락>·<편> 등으로 바뀌었다.

중국의 당나라와 송나라 이후부터 화무라는 것이 있었는데, <육화대>는 <곡파 曲破>와 함께 일시 단절되었다가 세종 이후부터 재편성되어 ≪악학궤범≫에 그 무보(舞譜)가 실리게 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은 1981년 국립극장에서 국립국악원 주최로 재연된 바 있다.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악학궤범(樂學軌範)』
『정재무도홀기(呈才舞圖笏記)』
『당악(唐樂)연구』(차주환, 범학도서, 1976)
『한국전통무용연구』(장사훈, 일지사, 1979)
『한국무용개론』(장사훈, 대광문화사,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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