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에 외국 사신을 맞아 접대하던 곳으로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태평관·모화관(慕華館)·동평관(東平館)·북평관(北平館) 등이 있었다.
태평관은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기 위해 숭례문 안 황화방(皇華坊)에 두었으며, 모화관 역시 중국 사신을 맞이하기 위해 돈의문 서북쪽에 지었다. 그리고 동평관은 일본 사신을, 북평관은 야인(여진)을 접대하던 곳이었다.
태평관의 유래는 고려시대의 정동행성(征東行省)을 태평관으로 고쳐 부른 데서 비롯되었다. 원래 정동행성은 일본 정벌을 위해 원나라 세조(世祖)가 세운 것이었으나, 몽고가 물러간 뒤 중국 사신의 숙소로 바뀌었다.
조선시대에 궁궐과 도성을 새로 창건하면서 1393년(태조 2) 정동행성을 고쳐 태평관이라 하였다. 그 뒤 1395년에 각 도의 인부 1,000여 명을 징발, 태평관을 신축하고 영접도감(迎接都監)의 관리 아래 두어 사신 접대소로서의 기능을 하게 되었다.
중국 사신에 대한 영송은 대체로 칙사가 벽제관에 이르면 영접사(迎接使) 등을 파견하고, 왕은 왕세자 이하 문무 신하를 거느리고 모화루에 거둥, 영칙의(迎勅儀)에 따라 칙사를 맞이하였다.
그리고 경복궁으로 안내해 칙서를 전달받고 다례(茶禮)를 베푼 뒤 태평관에 머물게 하였다. 이때 하마연(下馬宴)을 베풀어 대접하고, 그 다음 날 임금이 거둥해 익일연(翌日宴)을 베풀고, 국사를 논의하고 물러가면 다시 전별연(餞別宴)을 베풀어 전송하였다.
이와 같은 칙사영송 절차에 따라 양국 간의 현안 문제를 처리하는 등 태평관은 외교상 중요한 기능을 다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