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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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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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 조선 시대에 역관(驛館)에 지급된 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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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고려 · 조선 시대에 역관(驛館)에 지급된 토지.
내용

역관은 관역(館驛)이라고도 하며 고려시대 이전부터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평안도에 설치된 역을 주로 관이라 하였다. 공용 여행자의 숙식과 빈객을 접대하기 위해 설치했던 국영 기관인 객관(客館)과는 성격을 달리하는 것으로, 역과 거의 같은 기능을 수행하였다.

1413년(태종 13)에는 역승(驛丞), 1415년 이후에는 관승(館丞), 1429년(세종 11)에는 평안도생양관로찰방(平安道生陽館路察訪)·평안도신안관로찰방(平安道新安館路察訪)의 관할 아래 관로(館路)를 조직하였다.

이러한 관에는 관역(館役)에 종사하는 관군(館軍)과 관부(館夫) 및 전운노비(轉運奴婢) 등을 소속시켰다. 그리고 이들에게 신역의 대가로 관군위전인 마위전(馬位田)·구분전(口分田) 등을 지급하였다.

이와 같이 관의 소요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지급된 토지가 관전인 것이다. 따라서, 관전은 넓은 의미로는 구분전·마위전·공수전(公須田, 또는 衙祿田)을 총칭하는 것이 된다.

이러한 토지의 지급 실태를 살펴보면, 고려시대에는 대체로 대로관은 5결(結), 중로관은 4결, 소로관은 3결씩 지급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역참으로 개편되면서 역과 같이 대로·중로·소로에 따라 공수전 또는 아록전, 관둔전(官屯田)이 지급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또, 관군에게 절급된 마위전의 지급 규모는 자세하지 않지만 경작 방법은 스스로 경작하는 자경(自耕)이 원칙이었다. 그러나 그 관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사는 자가 관군이 되는 경우와 기타 이유 때문에 타인을 경작시켜 세금을 거두어들이는 차경(借耕) 또는 병경(並耕)이 변칙으로 실시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1433년 2월 평안도의 찰방이 병조에 보고한 바에 따라 인마위전(人馬位田)이나 관부·전운노에게 지급된 구분전은 타인에게 경작하게 해서 세를 거두어들이지 말도록 조처하기까지 하였다.

한편, 사사노비(寺社奴婢)로 충당된 전운노비나 보충군에서 충원된 관부의 경우도 소경전(所耕田)·구분전 등의 형태로 토지를 절급받아 소요 경비를 마련하였다. 소경전은 유망한 절호인(絶戶人)의 토지나 한전(閑田)을 지급받았다. 구분전은 주로 관 근처의 군자전(軍資田)으로써 충급되고 때로는 민전(民田)을 환급받아 절급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구분전이나 소경전도 대부분 자경에 의해 이루어진 것은 물론이다. 그 뒤 조선 후기에 이르러 관군의 입마역은 고마제(雇馬制)와 병행해 실시되어 일이 가중되었다. 이 관의 운용비는 대동법 실시에 따라 대동미로써 획급되었으며, 또한 관전의 경작도 관군을 포함한 역민(驛民)의 신공(身貢)으로써 충당되었다.

참고문헌

『고려사』
『태조실록』
『태종실록』
『세조실록』
『중종실록』
『현종실록』
『경국대전』
『관서역지(關西驛誌)』
『비변사등록』
「조선후기의 역지분석 Ⅰ」(조병로, 『동국사학』 18,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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