첩은 신분이나 중혼 등 혼인 성립 요건에 하자가 있거나 혹은 정식의 혼인 의례를 갖추지 않고 맞아들인 규방의 반려를 말한다. 이칭으로 첩실, 소실, 부실, 별실 등이 있다. 이외에도 신분에 따라 양첩, 천첩, 비첩, 기첩 등으로도 불렸다. 1413년(태종 13)에 처가 있는데 또 처를 얻는 중혼을 금지하는 법이 제정되었다. 이에 한 사람의 처 외에는 모두 첩이 되었다. 모계 성분을 중요하게 여긴 조선 시대에 첩자에 대한 법적·사회적 차별이 존재하였다. 그런 점에서 후사를 얻기 위해 첩을 들인다는 명분보다 여색을 탐한다는 비판이 존재하기도 했다.
첩은 전근대시대에 남성이 여러 여성을 거느릴 수 있다는 인식하에서 배태되었다. 여러 명의 여성을 아내로 삼되, 이들에게 병렬적 지위를 인정하는 것이 다처제(多妻制)이고, 오직 1명의 여성에게만 우월한 정처(正妻)로서의 지위를 주고, 나머지 여성을 첩이라 하는 것은 일부일처제(一夫一妻制)에 해당한다. 첩은 일부일처제하의 처는 물론 다처제하의 처에 비해서도 차별받는 존재였다.
고대와 고려시대의 지배층들은 2처 이상을 처로 맞이하기도 했지만 신분이 낮은 여성을 데리고 사는 경우 처로 인정하지 않고 ‘첩’이라고 했다. 조선 건국 후인 1413년(태종 13)에 처가 있는데 또 처를 얻는 중혼을 금지하는 법이 제정된 후에는 한 사람의 처 외에는 모두 첩이 됨으로써 처와 첩의 명분이 분명해졌다.
뿐만 아니라 조선 정부에서는 적처(嫡妻)와 첩 사이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행위를 규제함으로써 첩으로 인해 처의 지위가 침해되는 것을 막고자 했다. 낮은 신분으로 인해 천시 받던 첩은 조선 건국 이후의 이와 같은 법 제정과 유교 이념의 영향으로 또 다른 부정적 시선을 받게 되었다.
일부일처제를 법으로 규정했던 조선시대에는 관료들이 정당한 이유 없이 처를 버리면 처벌했지만 첩을 버리는 행위는 규제하지 않았다. 따라서 첩으로서의 지위와 권리는 오롯이 남편의 사랑과 신뢰에 의해서만 보장받을 수 있었다. 다만 첩이 자녀를 낳은 경우에는 처지가 조금 나았다. 남편과의 관계가 좀더 안정될 가능성이 높아지며, 법적으로도 권리를 일부 보장받을 수 있었다.
가족 내에서 첩의 지위가 안정적이지 못한데 비해 가족에 대한 의무는 법으로 규정되었다. 가족내에서 첩의 의무를 상징적으로 드러내주는 제도가 복상(服喪) 제도였다. 『경국대전(經國大典)』의 복상 규정에는 첩이 남편을 위해 참최(斬衰) 3년, 남편의 부모 · 적처 · 자녀를 위해 각각 기년(期年)의 상복을 입도록 규정되어 있다.
반대로 남편, 시부모, 적처, 남편의 자녀는 그를 위해 복상할 필요가 없었다. 예외적으로 자녀가 있는 서모(庶母)를 위해서는 자최(齊衰) 기년복을 입도록 했다. 이러한 복상 제도를 통해 첩은 남편과 적처, 남편의 직계 존속과 비속에게 일방적으로 가족으로서의 의무를 다해야 했음을 알 수 있다. 또 자식이 있는 첩에 대해서만 남편의 자녀들이 서모로서 예우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첩이 어머니를 잃은 다른 첩의 자녀를 기른 경우에는 길러준 첩을 위해 친어머니와 같은 자최 3년복을 입도록 하는 규정도 있었다.
복상의 의무뿐 아니라 첩은 남편이 범죄를 저질렀을 때 처와 마찬가지로 연좌되었다. 또 남편, 적처, 시부모 등 남편의 가족이나 친족을 욕하거나 폭행하는 행위, 남편을 고소하는 행위, 남편을 배반하고 도망하는 행위 등을 했을 때도 처와 마찬가지로 엄격하게 처벌되었다. 심지어는 남편이 첩에 빠져서 처를 버리거나 학대한 경우에도 남편과 함께 처벌받았다.
첩에게 자녀가 있으면 그 자녀는 남편의 재산을 일부 상속받을 수 있었으며, 남편에게 적자녀가 없으면 그 자녀가 남편의 적처 재산의 일부를 받을 수도 있었다. 유교적 제사형태가 정착되었던 조선시대에 처는 남편과 함께 가묘에 모셔져 봉사를 받았지만 첩은 가묘에 들어가지 못했다. 그렇지만 소생자녀가 있으면 따로 제사를 받을 수 있었다.
첩을 두는 것은 기본적으로 부부간의 의를 상하게 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조선시대의 위정자들은 부부의 의를 강조하며 일부일처제를 표방하면서도 첩을 두는 것을 규제하지 않았다. 그리고 가족 내에서 첩의 일방적 의무를 강조하고 첩이 남편과 남편의 적처에게 순종하도록 했으며, 첩에 대한 처의 투기를 죄악시하여 가족질서를 유지하려 했다.
이렇게 지배층 남성들은 법과 윤리를 내세워 처와 첩이 화목하게 지내는 것을 미덕이라고 하며 가족 질서를 유지하려 했지만 실제로는 첩을 두는 것 자체가 가족 내의 분란을 일으키는 일이었다. ‘시앗 죽은 눈물이 눈가에 젖으리’, ‘시앗싸움에 돌부처도 돌아앉는다’와 같은 속담은 처첩간의 갈등을 잘 보여준다.
첩을 들이는 것에 대해서 당시 지배층들은 후사를 얻기 위한 것이라는 명분을 내세우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여색을 탐하는 것이라는 비판이 존재하기도 했다. 전근대시대 중국과는 달리 우리나라에서는 자녀의 사회적 지위에 모계 신분이 중요했다. 천한 신분인 첩과 첩자에 대한 법적·사회적 차별이 존재하여 첩자녀가 적자녀와 같은 정치적·사회적 활동을 하기가 어려웠다. 그런 점에서 후사를 얻기 위해 첩을 들인다는 명분은 수사에 불과한 경우가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