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가(改嫁)는 재가(再嫁), 재초(再醮), 재혼(再婚)이라고도 한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처가 남편에게 의리를 지켜야 한다는 유교적 관념에 따라 여성의 개가를 규제함으로써 여성의 개가 문제는 전근대시대 한국 여성의 지위를 설명하는데 주요한 주제가 되었다.
여성의 정절은 전근대시대 부계 중심의 가족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강조되었다. 특히 유교 이념이 사회사상으로 정착되면서 여성의 정절은 당위적인 가치로 부상했다. 고려 예종대에 남편이 있는 여성이 음행(淫行)을 저지른 경우 자녀안(恣女案)에 수록하고 침공(針工)으로 정속시키도록 하는 규정이 제정된 것은 그 한 예이다. 그러나 고려시대까지는 남편과 이혼하거나 사별한 경우에 다시 혼인하는 것은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한 예로 광종의 딸이었던 문덕왕후(文德王后) 유씨(劉氏)는 홍덕원군(弘德院君)에게 시집갔다가 뒤에 성종의 배필이 되었다. 또한 수비(壽妃) 권씨(權氏)는 전신(全信)의 아들과 혼인했다가 왕명으로 이혼하고 충숙왕의 비(妃)가 되기도 했다. 조선 초에도 고위관직자의 처가 재혼하는 사례들이 나타난다. 그런데 조선 건국 직전인 1391년(공양왕 3)에 남편이 사망한 후 개가한 자의 봉작(封爵)을 추탈하도록 한 법이 제정되었다. 그리고 조선 건국 후의 외명부(外命婦) 봉작 규정에서도 개가한 여성의 봉작을 추탈하는 규정이 다시 천명되었다.
태종대와 성종대에는 양반층 여성의 개가를 규제하는 보다 강도 높은 법이 제정되었다. 1406년(태종 6)에는 대사헌 허응(許應)의 건의에 따라 양반의 정처(正妻)로 세 번 남편에게 시집가면 자녀안에 기록하도록 했다. 삼가녀(三嫁女)를 자녀안에 기록함으로써 그 자손의 관직 진출을 제한하려 한 것이다. 이후 1477년(성종 8) 성종은 재가(再嫁)한 여성의 자손을 벼슬길에 오르지 못하게 하도록 명했다. 성종은 ‘신(信)은 부덕(婦德)이며, 한 번 같이 했으면 종신토록 고치지 않는다’라고 하고, 삼종지의(三從之義)를 언급하며 이러한 명을 내렸다. 이에 대해 여러 대신과 대간들이 의탁할 곳이 없는 과부의 재가까지 규제하는 것은 지나치다며 반대했지만 성종은 ‘굶주려 죽는 것은 작은 일이고, 절개를 잃는 것은 큰 일(餓死事極小, 失節事極大)’이라며, 이 명을 철회하지 않았다.
재가녀 자손의 관직 진출을 규제한 성종대의 수교는 『경국대전』에도 반영되었다. 실행부녀(失行婦女)와 재가(再嫁)한 여성의 아들과 손자는 동반직(東班職)과 서반직(西班職)에 모두 서용하지 못하도록 했고, 증손(曾孫)대에 이르면 의정부, 6조, 한성부, 사헌부, 개성부, 승정원, 장예원, 사간원, 경연, 세자시강원, 춘추관, 지제교, 종부시, 관찰사, 도사, 수령직에 제수하지 못하도록 규정되었다(『경국대전』 이전(吏典) 경관직(京官職)). 이 법이 제정됨으로써 재가한 여성의 아들과 손자는 관직에 진출할 수 없게 되고, 증손 이후 자손도 대대로 현직(顯職)에는 진출할 수 없게 되었다. 이에 따라 이후 양반층 여성의 재가는 거의 불가능해졌다.
여기에 여성의 정절이 극단적으로 강조되어 감에 따라 여성의 개가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확산되어 갔다. 그 결과 조선 후기에는 양반층 여성이 아니라 하더라도 수절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개가가 죄악시되어가는 상황에서 남성들이 과부를 보에 싸서 데려와 혼인하는 이른바 과부 보쌈을 통해 개가를 하는 풍속이 나타나기도 했다.
근대화 과정에서 청상과부의 수절을 강요하는 사회에 대한 비판 의식이 대두되었다. 이러한 비판 의식을 반영하여 1894년(고종 31) 동학 농민군은 집강소를 설치하고 제시한 폐정개혁안에서 청춘과부의 개가를 허용하도록 했다. 또한 같은 해 갑오개혁 때 과부 재가는 귀천은 논하지 말고 자신의 의사대로 하도록 함으로써 조선 성종대 이후 400년이 넘는 세월동안 여성의 재가를 죄악시했던 법이 비로소 폐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