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종의 유릉은 1916년 조사를 통해 3층단으로 되어 있고, 봉토의 지름은 720㎝이며, 12각 병풍석과 난간석이 남아 있었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광복 후 1963년 조사 당시에는 황폐하여 봉토나 병풍석 및 난간석이 거의 다 흙에 묻혀 있었고, 석물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1978년 발굴 조사를 통해 내부 구조와 무덤칸을 밝히고 몇몇 유물을 수습한 후, 문밖에 큰 돌 3매를 포개어 영구히 폐쇄하였다. 1990년 보수 정비를 통하여 유릉의 영역은 5‚890㎡ 정도 되고, 현재의 모습처럼 3층단으로 구성하였으며 없어진 병풍석의 면석과 만석을 교체하였다.
능역은 비교적 협소하지만 3층단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봉분의 높이는 250㎝, 지름은 840㎝이다. 지면으로부터 병풍석의 높이는 대체로 80㎝이고, 이마돌의 높이는 30㎝이며, 면석의 높이는 50㎝이다. 병풍석의 외곽으로 난간기둥 몇 개만 노출되어 있고, 그밖에 다른 석물은 없다.
병풍석에서 215㎝ 앞쪽에 높이 70㎝의 잡석을 쌓아 제1단과 제2단을 구별하였다. 제1단 축석에서 340㎝ 떨어져 긴 장대석으로 높이 80㎝의 석축을 쌓아 제2단과 제3단을 구별하였다. 제3단 아래는 자연 경사면이고, 축대로부터 1,306㎝ 아래로 정자각 터가 있다. 정자각 터에는 초석은 보이지 않고 기와장 파편들이 산재되어 있다.
1978년 11월 3일부터 수일 간 북한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에서 유릉을 발굴하였다. 무덤칸의 방형은 병풍석의 대각선 방향과 같으며 약간 서쪽으로 치우친 남향이다. 널방은 평천장으로서 남북의 길이는 305㎝, 동서 너비는 185㎝, 높이는 190㎝이다. 천장은 두께 65㎝의 돌 3매로 덮었으며, 그 위에 회칠하고 그 부분에 별자리가 그려져 있던 흔적이 있다. 벽은 막돌로 쌓아 올리고 진흙을 바르고 그 위에 회칠하였지만 다 떨어져 나갔다.
널방 바닥에는 33x32㎝ 크기의 전돌을 깔았다. 관대 주위로 길게 한 줄로 깔고 나머지 부분에는 반 장짜리의 전돌을 깔았다. 널방의 중심에는 남북으로 180㎝, 동서의 너비는 80㎝의 관대를 놓았다. 관대석은 두께 25㎝의 돌 3장을 맞물려서 만들었다. 널방 바닥에 깐 좌우로 올라온 높이는 15㎝, 나머지는 10㎝이다.
유릉은 발굴 당시 이미 도굴된 상태였다. 남쪽으로 난 널문은 모두 썩어 없어졌는데, 널문에 달았던 문 장식품과 길이 26㎝, 너비 8㎝의 도금한 청동 자물쇠가 출토되었다. 그밖에 도굴되고 남은 길이 11㎝, 너비 1.5㎝ 크기의 청동제 손칼과 개원통보(開元通寶)를 비롯한 화폐 몇 닢도 출토되었다.
고려 전기 왕릉으로서 능주가 밝혀져 있고, 1978년 북한 고고학연구소의 발굴을 통해 능 내부를 밝히고, 1990년 보수 정비되었다. 북한의 보존급유적으로 지정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