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렬왕(忠烈王, 12361308, 재위 12741308)은 재위 34년째인 1308년 7월 기사일에 73세의 나이로 신효사(神孝寺)에서 세상을 떠났다. 빈전은 숙비(淑妃) 숙창원비 김씨의 저택에 마련되었고, 충선왕이 즉위하여 같은 해 10월 정유일에 경릉(慶陵)에 안장하였다.
이때 영구가 처음 떠나자, 충선왕이 직접 거친 베로 만든 상복〔최마질〕을 입고 손수 향로를 들고 걸어서 십천교(十川橋)에 이르러서야 견여(肩輿)를 타고 산릉(山陵)에 이르렀다. 장례를 마치자 크게 곡(哭)을 하고 돌아와서 상복을 벗었는데, 이는 이전에 일찍이 없던 효행이라고 여겼다.
충렬왕 왕거(王昛)는 원종의 장남이며, 어머니는 순경태후(順敬太后) 김씨이다. 1274년(원종 15) 5월 원나라에 가서 세조의 딸인 제국대장공주(齋國大長公主)와 결혼하였고, 그해 6월 원종의 사후 귀국하여 8월에 왕위에 올랐다. 1298년 세자인 충선왕에게 양위하고 태상왕이 되었다가 몇 달 후 다시 왕위에 복귀하는 등 정치를 혼란하게 만들었다. 1308년 73세로 승하하여 경릉에 묻혔고, 혼전은 24개월간 존속하였다.
왕의 신주는 1310년 9월 정축일에 태묘에 부묘하였다. 진전사원(眞殿寺院)은 삼현리에 있는 묘련사(妙蓮寺)에 있다. 고려시대에 왕릉의 관리는 제릉서(諸陵署)를 설치하여 담당하도록 제도화되어 있었다.
1371년(공민왕 20) 12월 기해일에 공민왕은 제릉서를 관할하는 대상시(大常寺)를 법도에 맞게 정리하고, 제릉전직((諸陵殿直)을 새로 선발하였다. 그러한 다음 공민왕이 친히 1372년(공민왕 21) 11월에 충렬왕 경릉에 제사를 올렸다.
경릉은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개경에서 서쪽으로 12리에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어, 현재 개성특별시에 안장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정확한 위치가 밝혀지지 않아 능제나 구조를 알 수 없다.
고려에서는 왕의 사후 묘호와 능호를 붙이는데, 원나라 간섭기에 묘호 대신 ‘충’ 자가 붙은 충렬왕으로 불렸지만, 무덤에는 능호를 붙여 경릉이라고 불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