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릉(明陵)은 북한 개성특별시에 있는 고려 전기 제8대 국왕 현종의 제3비인 원성왕후 김씨의 능이다. 1028년 7월에 조성하였는데 『고려사』에는 현종의 선릉과 원성왕후의 명릉을 지키는 인원이 같다는 기록으로 보아 1031년 조성된 현종의 선릉이 있는 곳에 3기의 무덤이 있어 그중 1기가 원성왕후릉일 가능성이 높다. 현재 북한에는 명릉이라는 고려왕릉의 능호를 지닌 곳에 3기의 무덤이 있지만, 이곳은 충목왕의 명릉으로 여겨져 능호만 같을 뿐이지만, 명릉떼 2릉의 능묘 문석인이 선릉떼 1릉의 것과 양식적으로 같아 이곳일 가능성도 있다.
원성왕후(元成王后)는 시중을 지낸 김은부(金殷傅)의 딸이며, 어머니는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에 추증된 이허겸(李許謙)의 딸이다. 1010년(현종 1) 현종의 제3비인 연경원주가 되었다가, 정종을 낳은 뒤 궁주가 되고 곧 왕비로 봉해졌다. 왕비의 두 자매 모두 왕비가 되어 세 자매가 왕비가 된 왕실족내혼의 사례이다.
덕종과 정종, 인평왕후(仁平王后), 경숙공주(景肅公主) 등을 낳았다. 1028년(현종 19) 7월 을묘일에 세상을 떠나 능호를 명릉(明陵)이라 하였다. 1031년(현종 22) 현종의 사후, 신주는 태묘의 현종묘(顯宗廟)에 부제(祔祭)되었고, 덕종 즉위 후 왕태후로 추존되었다.
원성왕후의 명릉은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어 묘제와 널방의 구조 등을 파악할 수 없다. 『 고려사』 「위숙조」에 의하면 현종의 선릉(宣陵)과 마찬가지로 원성왕후 명릉에는 산직장상 2명을 배치하여 왕릉과 왕후릉을 지켰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보아 현종의 선릉 근처에 존재할 가능성이 있다.
현재 현종 선릉은 개성특별시 개풍군 해선리에 자리하고 있는데, 이곳에는 3기의 왕릉급 무덤이 있어 선릉떼 1릉, 선릉떼 2릉, 선릉떼 3릉으로 부르고, 이 중 1기가 원성왕후의 명릉일 것으로 추정된다.
선릉떼 1릉은 봉토 아래에 병풍석과 난간석, 망주석, 문석인 2쌍과 석호 1쌍이 유존하여 능주가 현종이라면, 나머지 선릉떼 2릉이나 선릉떼 3릉 중 1기가 원성왕후의 명릉일 수 있다.
조선에 들어서 1662년(현종 3)에 고려왕릉에 대한 실태 조사를 하면서 명릉의 상태에 대한 기록이 보이지만, 이것은 고려의 왕릉에 대한 기록이어서 원성왕후 명릉보다는 충목왕 명릉을 지칭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다만 명릉 주위에 3기의 무덤이 있다고 되어 있는데, 무담칸 내부까지 밝혀진 명릉떼 1기가 충목왕 명릉이라면, 원유관을 쓴 형상의 문석인이 현종 선릉으로 여겨지는 선릉떼 1릉과 유사한 명릉떼 2릉이 원성왕후의 명릉일 가능성은 남아 있다. 원성왕후의 명릉인지, 충목왕의 명릉인지 밝히기 어렵지만, 명릉이라는 능호가 있는 무덤군들은 1818년(순조 18)과 1867년(고종 4)에 표석을 세워 조선 후기까지 지속적으로 관리되었다.
고려의 왕릉 중에 명릉이라는 능호는 2기에 사용되었는데, 고려 전기 제8대 현종의 제3왕비인 원성왕후 명릉과 고려 후기 제29대 충목왕 명릉이다. 현재 북한 개성특별시에는 명릉떼라 하여 명릉의 능호를 지닌 무덤에 3기가 함께 자리하여 명릉떼라고 지칭하고 있다. 이곳 3기의 무덤 중 고려 전기 원성왕후의 명릉과 고려 후기 충목왕의 명릉이 혼재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다.
다만 발굴에 의해 무덤 내부 구조가 밝혀진 명릉떼 1릉이 충목왕 명릉일 가능성이 높다면, 명릉떼 2릉은 원유관을 쓰고 비스듬히 홀을 든 능묘조각의 특성이 현종 선릉으로 비정되는 선릉떼 1릉의 능묘 조각과 양식적으로 친연성이 높아 원성왕후 명릉일 가능성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