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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
의생활
물품
관료들이 국가의 중요한 의례에서 손에 드는 상아, 나무 등으로 만든 좁고 긴 판.
이칭
이칭
규(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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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홀(笏)은 관료들이 국가의 중요한 의례에서 손에 드는 상아, 나무 등으로 만든 좁고 긴 판(板)이다. 황제나 왕의 것은 규(圭), 문무관리들의 것은 홀(笏)이라 한다. 고구려와 백제에서는 홀에 대한 기록을 찾을 수 없다. 홀의 사용이 문헌으로 확인되는 것은 신라 법흥왕 10년(523) 때이다. 발해, 고려에서도 공복 같은 것을 입을 때 홀을 들었으며, 계급에 따라 아홀(牙笏)과 목홀(木笏)의 차이가 있었다. 조선에서도 조복 · 제복 · 공복에 홀을 들었는데, 계급에 따라 재료, 모양, 크기 등에 차이가 있었다.

키워드
정의
관료들이 국가의 중요한 의례에서 손에 드는 상아, 나무 등으로 만든 좁고 긴 판.
연원

홀(笏)은 임금 앞에서 아뢸 말을 잊지 않게 적거나 왕의 명령이나 뜻을 기록하기 위해 들던 것에서 유래되어 의례 용품이 된 것이다. 『주례(周禮)』의 기록으로 중국에서는 고대부터 하늘과 땅, 산천과 바다 등에 제사를 지낼 때 천자(天子) 이하 관원들이 신분에 따라 형태나 재료, 색에 차등을 둔 홀을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형태와 제작방법

홀은 계급에 따라 재료가 다르며 시대에 따라 길이와 형태 등에 차이가 있었다. 황제, 왕, 왕세자와 왕비, 세자빈의 것은 규(圭)라고 부르는 반면, 신하들의 것은 홀이라 한다.

우리나라에서 언제부터 홀의 제도를 받아들였는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고구려 안악 3호분(357년) 벽화에서 묘주 오른쪽의 시종이 손에 들고 있는 물체를 홀로 추정하기도 한다. 백제의 공복(公服) 제도에는 홀에 대한 기록이 없다. 홀의 사용을 문헌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523년(법흥왕 10)이다. 520년 신라에서 백관(百官)의 공복을 정하고, 그로부터 3년 후 자 ‧ 청 ‧ 황색의 공복을 다시 정하면서 9위까지 상아로 만든 홀〔牙笏〕을 정한 내용이 『삼국사기(三國史記)』 색복조(色服條)에 기록되어 있다. 이후 650년(진덕왕 4) 기록에도 진골 중 작위(爵位) 소지자가 아홀을 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발해에서도 당의 예제(禮制)를 받아들여 5품까지는 아홀, 69품은 목홀(木笏)을 들도록 하였다. 통일신라의 제도를 계승한 고려에서도 홀의 사용은 계속되었다. 고려의 왕은 옥규(玉圭)를 사용하였으며, 백관은 신분에 따라 아홀과 목홀을 들었다. 최유선(崔惟善, 미상1075)의 초상화에 보이는 홀은 조선시대 왕의 규와 같이 위가 삼각으로 뾰족하다. 강민첨(姜民瞻, 미상∼1021)의 초상화는 1788년(정조 12)에 옮겨 그린 것인데 홀의 위가 각진 형태로 묘사되어 있다.

조선시대의 홀의 제도는 『경국대전(經國大典)』 예전(禮典)에 기록되어 있다. 조복(朝服), 제복(祭服), 공복(公服) 등의 예복에는 홀을 들고 집무복인 상복(常服)과 시복(時服)에는 홀을 들지 않았다. 1∼4품의 관리는 상아, 5∼9품은 나무로 만든 홀을 들었으며, 향리(鄕吏)도 공복에 목홀(木笏)을 들도록 하였다. 홀의 형태와 사용에는 시대적 변화가 있었으나, 임진왜란 이후 국말(國末)까지 조복과 제복에는 홀의 사용이 계속되었다. 홀이나 규를 손으로 잡는 아랫부분의 색을 황제와 황후는 황색, 왕은 홍색, 관리들의 경우는 청색 비단으로 감쌌다. 왕실에서는 규를 나무 상자 안에 보관했지만 관리들은 보통 홀대(笏袋)라고 하는 비단으로 만든 주머니에 넣었다. 현재 남아 있는 홀의 유물은 모양과 크기가 다양하여 너비는 4.58㎝ 전후, 길이는 2555㎝ 전후로 폭넓게 나타난다. 규와 홀의 아랫부분은 모두 방형(方形)이지만 조선시대의 규는 위가 뾰족한 반면 홀은 대체로 윗부분이 둥근 편이다. 하지만 전세(傳世)의 유물을 보면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아 윗부분이 각진 아홀도 발견된다.

참고문헌

원전

『경국대전(經國大典)』
『주례(周禮)』

논문

이승해, 『고려시대 官服 연구』(이화여자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1)
임명미, 「한·중·일 3 국의 규·홀에 관한 연구」(『복식』 51-2, 한국복식학회, 2001)
최영선, 『조선시대 문무백관 제복에 관한 연구』(단국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4)
관련 미디어 (4)
집필자
홍나영(이화여자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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