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종 ()

고려시대사
인물
고려 전기 제10대 왕.
이칭
성명
왕형(王亨)
군호
평양군(平壤君)
시호
용혜(容惠)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018년(현종 9)
사망 연도
1046년(정종 12)
출생지
개경
주요 관직
고려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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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정종은 고려 전기 제10대 왕이다. 재위 기간은 1034~1046년이며, 동복형인 덕종의 서거로 왕위에 올랐다. 즉위년에 팔관회를 열어 송나라 등 외국 상인들에게도 예식을 관람시키는 상례를 만들었다. 변경의 방위를 위해 힘썼고, 동서대비원을 수리해 가난하고 병든 자들에게 의복과 음식을 주었다. 1037년 거란의 침입을 받아 거란의 연호를 사용하고 책봉을 받았지만 이후 북방 경비에 주력해 1044년 덕종의 유업인 천리장성을 완성했다. 노비종모법과 장자상속법을 제정했다. 병이 위독하자 아우 왕휘(뒤의 문종)로 하여금 국정을 맡게 했다.

정의
고려 전기 제10대 왕.
가계 및 인적사항

재위 기간은 1034∼1046년이다. 이름은 왕형(王亨). 자(字)는 신조(申照)이다. 현종(顯宗)김은부(金殷傅)의 딸인 원성왕후(元成王后) 김씨(金氏) 소생의 둘째 아들이며, 덕종(德宗)의 친동생이다. 왕비(妃)는 단주인(湍州人) 한조(韓祚)의 딸인 용신왕후(容信王后) 한씨와 용의왕후(容懿王后) 한씨, 부여군(夫餘郡) 출신 이품언(李禀焉)의 딸인 용목왕후(容穆王后) 이씨(李氏), 경주인(慶州人) 김원충(金元冲)의 딸인 용절덕비(容節德妃) 김씨, 그리고 연창궁주(延昌宮主) 노씨(盧氏)가 있다. 아들은 용신왕후 소생의 왕형(王詗)과 용의왕후 소생의 애상군(哀殤君) 왕방(王昉)·낙랑후(樂浪侯) 왕경(王璥)·개성후(開城侯) 왕개(王暟) 등 4명이 있었으며, 딸은 용목왕후 소생의 도애공주(悼哀公主)가 있었다.

주요 활동

1018년(현종 9)에 태어나 1022년(현종 13)에 평양군(平壤君)으로 책봉되었으며, 1027년(현종 18)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검교태사(檢校太師)·겸내사령(兼內史令)에 임명되었다.

1034년(덕종 3) 9월 동복형인 덕종의 유명(遺命)으로 왕위에 오른 정종은 같은 해 10월 서경(西京)에 이어 11월에는 개경에서 팔관회(八關會)를 개최하여 자신이 직접 신봉루(神鳳樓)에 거둥하여 참가하였으며, 송나라 등 외국 상인들도 예식을 관람할 수 있는 것을 상례로 만들었다. 그 뒤, 1036년(정종 2)과 1039년(정종 5) 그리고 1041년(정종 7)에도 팔관회를 개최하였는데, 그것은 유교 정치를 지향하던 성종(成宗)이 간소화시켰던 팔관회를 부활하고자 했던 현종과 덕종의 뜻을 이어받아 새롭게 정비해 나갔던 과정으로 이해된다.

1035년(정종 1)에는 서북로(西北路) 송령(松嶺) 동쪽에 장성(長城)을 쌓아 변방의 수비를 강화하고, 지금의 평안북도 창성(昌城)에도 성을 쌓고 백성을 옮겨 살게 하면서 창주(昌州)라 이름하였다. 1036년(정종 2)에는 제위군(諸衛軍)에게 토지를 지급한 뒤 변경의 방비를 굳게 하였다. 1037년(정종 3)에는 압록강 일원에서 거란(契丹)의 침입을 받고 나서 그 이듬해에 거란의 책봉을 받고 그 연호도 사용하였지만, 그 뒤부터 북방의 경비에 주력해서 1044년(정종 10)에 마침내 덕종의 유업인 천리장성(千里長城)을 완성하였다. 이는 압록강 어귀에서부터 동해안의 도련포(都連浦: 현, 함경남도 정평군과 함주군에 있는 광포호)에 이르는 것이었다.

한편, 1036년에는 동서대비원(東西大悲院)을 수리하여 가난하고 병든 자들에게 의복과 음식을 나누어 주었으며, 1039년(정종 5)에는 노비종모법(奴婢從母法)을 제정하였다. 또한 1045년(정종 11)에는 악공(樂工)과 잡류(雜類)들의 자손들이 과거에 나가는 것을 금지하였고, 이듬해에는 장자상속법(長子相續法)을 제정하였다. 그리고 1045년에는 비서성(秘書省)으로 하여금 『예기정의(禮記正義)』·『모시정의(毛詩正義)』 등을 간행해 문신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정종은 병이 심해지자, 어린 아들들도 있었지만 이복동생인 낙랑군(樂浪君) 왕휘(王徽: 문종)에게 왕위를 넘겨주었다. 그리고 1046년(정종 12) 5월에 세상을 떠났다.

성격이 너그럽고 어질고 주1한데다 학식과 도량이 크고 넓으며 영특하고 과감하였다. 거란과 다시 화친해 나라가 태평했으며 유명으로 능침을 검소하게 하였다.

상훈과 추모

시호는 용혜(容惠), 묘호는 정종(靖宗), 능(陵)의 이름은 개성에 있는 주릉(周陵)이다. 1056년(문종 10)에 홍효(弘孝), 1140년(인종 18)에 영렬(英烈), 1253년(고종 40)에 문경(文敬)으로 시호를 더하였다.

참고문헌

원전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동사강목(東史綱目)』

단행본

김창현, 『고려의 불교와 상도 개경』 (신서원, 2011)

논문

김난옥, 「고려 정종대 입사와 직역 승계 규정」 (『한국사연구』 188, 한국사연구회, 2020)
한정수, 「고려 현종~정종대 팔관회의 정비와 그 의미」 (『한국사연구』 194, 한국사연구회, 2021)
허인욱, 「고려 덕종・정종대 거란과의 압록강 성겨・성보 문제」 (『역사학연구』 38, 호남사학회, 2010)
주석
주1

부모에 대한 효도와 형제에 대한 우애를 통틀어 이르는 말.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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