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릉

  • 역사
  • 유적
  • 고려 전기
북한 개성특별시 해선리에 위치한 고려 전기 제10대 정종의 능.
유적/고인돌·고분·능묘
  • 건립 시기고려 전기
  • 관련 국가고려
  • 관련 인물정종
  • 소재지북한 개성특별시 해선리
  • 재질흙, 화강암
집필 및 수정
  • 집필 2023년
  • 장경희 (한서대학교 교수, 미술사)
  • 최종수정 2024년 10월 06일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으로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주릉은 북한 개성특별시 해선리에 위치한 고려 전기 제10대 정종의 능이다. 정종은 1046년(정종 12) 9월 계묘일에 개성 북쪽 교외에 장례 지냈다. 2016년 개성특별시 해선리에 위치한 해선리 2릉을 발굴한 결과 정종 주릉으로 밝혀졌다. 주릉은 3단의 구획으로 나누어져 있다. 1단 봉분 주위에는 일부 난간석이 남아 있고 병풍석은 매몰되어 있었다. 2단에는 문인석 1기가 넘어진 것을 세웠다. 3단에는 정자각의 터가 있었던 초석이 발견되었다. 주릉에서는 다양한 종류의 고려청자 조각들이 출토되어 이 시기의 문화적 특징을 알 수 있다.

정의

북한 개성특별시 해선리에 위치한 고려 전기 제10대 정종의 능.

건립경위와 변천

정종(靖宗, 1018~1046년, 재위 1034~1046년) 왕형(王亨)은 제8대 현종(顯宗)의 둘째 아들이며 제9대 덕종(德宗)의 아우이다. 1034년(덕종 3) 덕종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1046년(정종 12) 4월에 병에 걸렸고, 모든 관리들이 정종의 회복을 바라며 절에 가서 기도를 올리기도 하였다. 곧 5월에 이복동생 왕휘(王徽, 문종)에게 국정을 맡기고 5월 정유일에 33세의 나이로 산호전(山呼殿)에서 승하하였다. 제11대 문종이 선덕전(宣德殿)을 빈전으로 삼아 왕실법도에 따라 장례를 치르고 같은 달 18일에 개성(開城) 북쪽 교외에 안장하였는데, 능호를 주릉이라 하였다. 당시 유사들이 유명을 받들어 산릉의 제도를 한 문제(漢文帝)의 고사에 따라 모두 검소하고 간략하게 하였다.

『고려사』 위숙군(圍宿軍)조에 의하면 정종 주릉은 산직장상(散職將相) 2명이 능을 수호하였다. 고려 왕실은 능침제도를 마련하였고 왕릉의 관리는 제릉서(諸陵署)를 두어 왕릉을 관리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거란과 몽골과의 전쟁 와중에 왕릉은 피해를 입었고 고려의 멸망 이후에는 제대로 관리되지 못하였다. 1432년(세종 14)에 주릉 주변에서 벌목하거나 채취하는 것을 금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간수인(묘지기)을 두고 관리가 이루어진 것으로 판단된다. 하지만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및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攷)』에는 북쪽 교외[北郊]라고 기록되어 있어 능의 위치를 잃어버렸다고 여겨진다.

개성특별시 해선리에는 해선리 1릉과 해선리 2릉이라 불리는 2기의 고려 왕릉이 위치해 있었는데, 고려 태조(太祖) 현릉(顯陵)으로부터 북동쪽으로 4㎞ 정도, 고려 제8대 현종의 선릉(宣陵)에서도 북동쪽으로 1.5㎞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다. 2016년 매봉 남쪽 경사면에 250㎝ 간격을 두고 동서로 나란히 조성되어 있던 두 릉을 발굴하였고 그중 해선리 2릉은 해선리 1릉보다 더 퇴락된 상태였는데, 제10대 정종 주릉으로 밝혀졌다.

형태와 특징

주릉은 능역의 구역이 좁고 화강암 축대에 의해 3단의 구획으로 나누어져 있다. 1단 봉분(封墳) 주위에는 일부 난간석(欄干石)이 남아 있고 병풍석(屛風石)은 매몰되어 있었다. 2단에는 문인석(文人石) 1기가 넘어진 것을 세웠다. 3단에는 정자각(丁字閣)의 터가 있었던 초석이 발견되었다. 주릉의 무덤칸은 벽체를 정교하게 잘 다듬은 화강암으로 쌓은 것이 확인된다. 특히 천정에는 화강암을 깎은 2개의 들보가 있고 이것을 지탱하는 2개의 기둥이 서 있다. 이렇게 여러 개의 돌기둥으로 받쳐준 것은 5세기 후반 고구려 왕릉인 쌍영총(雙楹塚)과 비슷하고 다른 고려 왕릉에서 볼 수 없는 새로운 건축 형식으로 보인다. 주릉 내부에서는 다양한 종류의 고려청자 조각들이 출토되었다.

의의 및 평가

주릉은 고려 제10대 정종의 왕릉으로 1046년에 조성되었다. 11세기 중반 고려 왕릉이며 부왕인 현종 선릉 근처에 위치하며 숙릉(肅陵)과 나란히 배치되어 있다. 능의 규모는 작은 편이고 2016년 발굴로 3단 구성에 문인석과 정자각터가 확인되어 고려 왕릉임이 밝혀졌다. 무덤칸에서는 청자 조각이 출토되어 이 시기 특징을 엿볼 수 있다.

참고문헌

  • 원전

  • - 『고려사(高麗史)』

  • -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 『여조왕릉등록(麗朝王陵謄錄)』

  • -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 단행본

  • - 장경희, 『고려 왕릉』 (예맥, 2008)

  • - 장경희, 『고려왕릉(개정판)』 (예맥, 2013)

  • 논문

  • - 김인호, 「고려시대 국왕의 장례절차와 특징」 (『한국중세사연구』 29, 한국중세사학회, 2010)

  • - 윤기엽, 「고려 혼전(魂殿)의 설치와 기능」 (『한국사상사학』 45, 한국사상사학회, 2013)

  • - 장호수, 「개성지역 고려왕릉」 (『한국사의 구조와 전개』, 혜안, 2000)

  • - 홍영의, 「조선시대 고려 왕릉의 현황과 보존 관리 실태: 여조왕릉등록을 중심으로」 (『한국중세고고학』 5, 한국중세고고학회, 2019)

주석

  • 주1

    : 능(陵)을 보호하기 위하여 능의 위쪽 둘레에 병풍처럼 둘러 세운 긴 네모꼴의 넓적한 돌. 겉에 12신(神)이나 꽃무늬 따위를 새긴다. 우리말샘

  • 주2

    : 왕릉에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봉분 앞에 ‘丁’ 자 모양으로 지은 집. 우리말샘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으로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콘텐츠 이용 안내

콘텐츠 수정 요청

필수 입력 항목입니다.

주제
0 / 500자
근거 자료
첨부된 파일이 없습니다
파일선택

최대 5개, 전체 용량 30Mb 첨부 가능

작성 완료되었습니다.

작성글 확인

다운로드가 완료되었습니다.

다운로드할 미디어를 선택해주세요.

모든 필수 항목을 입력해주세요.

다운로드할 미디어가 선택되지 않았습니다.

다운로드 중 오류가 발생했습니다.

미디어 다운로드

  • 이용 목적을 상세히 작성하여 주세요.
    서비스 개선에 반영하도록 하겠습니다.

출처 표기 : [사진명]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필수 입력 항목입니다.

이용목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