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종은 1034년(덕종 3) 9월 계묘일에 연영전(延英殿)에서 세상을 떠났으며, 선덕전(宣德殿)을 빈전으로 삼았다. 정종이 즉위하여 같은 해 10월 경오일에 왕실법도에 따라 장례를 치르고 개경 북쪽 교외에 안장하였으며 능호를 숙릉(肅陵)이라고 하였다. 이제현(李齊賢)의 기록에는 경릉(慶陵)으로 표기하고 있는데, 이는 충렬왕의 경릉을 잘못 표기한 것으로 여겨진다. 진전사원(眞殿寺院)은 기록에 전하지 않는다.
고려의 왕릉은 일반적으로 개경 서쪽·남쪽 교외에 대다수가 분포하는데, 덕종의 숙릉은 특이하게도 북쪽 교외에 위치함으로써 어떠한 정치적·풍수지리적 내막이 있음을 넌지시 내포하고 있다. 숙릉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으므로 묘제와 널방의 구조 등을 파악할 수 없다.
고려 당시 숙릉에 간수군이 배치되어 능을 지켰으며, 조선 세종 때인 1432년(세종 14)에 숙릉 주변에서 벌목하거나 채취하는 것을 금했다.『순조실록』에 1818년(순조 18) 2월 고려 왕릉 중 능주가 확실한 30기에 표석을 세우고 능주를 모르는 왕릉급 능묘에도 번호를 매겼다는 기록과,『고종실록』에 1867년(고종 4)에 고려 왕릉·왕비릉 57기의 능을 봉축하고 표석을 세웠다는 기록을 통해서, 조선 말엽까지 숙릉이 지속적으로 관리되었을 개연성이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