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재는 인류가 자연에서 채득한 물질 중 그 연원이 오래되어 역사와 문화의 발전 과정에서 늘 함께 해 온 소재이다. 돌은 구하기 쉬운 재료이기 때문에 가장 이른 시기부터 도구를 만드는 데 사용되었다. 우리 땅에서는 80만 년 전 구석기시대부터 큰 돌에서 작은 돌을 떼어 낸 뗀석기로 주먹도끼나 밀개, 찍개, 찌르개, 긁개 등의 석기 유물을 만들어 사냥을 하고 물고기를 잡으며 열매를 따는 데 사용하였다. 기원전 5000년부터 2000년까지 신석기시대에는 정착 생활을 하면서 석기의 표면을 잘 갈고 다듬어 세련된 간석기로 돌도끼, 돌낫, 갈돌, 단검 등의 실용적인 생활 용기를 만들었다. 고조선 시기에는 지석묘 건립을 위한 석재 채취와 운반 기술이 확립되어 다양한 면에서 발전을 이룩하였다. 단단한 화강암이 풍부한 우리나라에서는 선사시대부터 돌을 다루는 기술이 발달하였다.
석수는 돌을 깨거나 쪼고 다듬어 각종 조형물을 만드는 장인으로, 이들은 석장이나 석공이라고도 많이 불렸다.
삼국시대부터 석조물을 제작하는 석수는 국가적인 영건(營建) 사업에 동원되었다. 화강암이 많은 우리나라에서는 비교적 규모가 큰 성곽을 쌓거나 건축물을 지을 때 초석을 놓고, 왕릉을 영건할 때 석곽을 쌓았다. 이 시대 석수는 상당한 기술적 수준에 이르러 고구려의 국내성, 평양성 등 현존하는 대표적인 성이 고구려 석수의 뛰어난 기술로 지어졌다. 특히 삼국시대에는 불교가 들어온 이후 사찰의 중앙에 석탑이 세워지기 시작하였다. 중국은 흙을 구워 만든 전탑이 많고, 일본은 나무로 만든 목탑이 많은 반면, 우리나라는 풍부한 돌로 만든 석탑이 많은데, 이 때문에 ‘석탑의 나라’라고 불리기도 한다.
석불이나 석등과 같이 사찰에 필요한 신앙의 대상물을 조성할 때도 석수는 상당한 기술을 발휘하였다. 백제의 대표적인 석조물로 ‘백제의 미소’라 불리는 서산마애삼존불을 비롯하여 미륵사지석탑(639년) 등 석수의 뛰어난 기술이 발휘된 많은 유적이 현존한다. 이러한 수준 높은 석조물을 제작한 백제 석수 아비지(阿非知)는 황룡사구층탑을 조성하는 데 기여하였다. 또한 『일본서기(日本書紀)』의 기록(推古 18년 3월조)에 의하면 610년(영양왕 21)에 일본으로 건너간 고구려의 승려 담징(曇徵)은 맷돌을 만들어 주었다고 한다. 『삼국사기』 직관지에는 이와 관련된 직종이 보이지 않은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신라 때에는 민간 기술자를 동원했던 것으로 여겨지고, 『삼국유사』에 기록된 조각승 양지(良志)처럼 승려도 불상과 신장상을 조성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뛰어난 석수들의 활동으로 통일신라시대에는 불교 석조 문화의 황금기를 이룩하였다. 감은사지석탑(682년)을 비롯하여 불국사의 석가탑(742년)과 다보탑, 그리고 경덕왕 때 김대성이 만든 석굴암 본존불(751년), 팔당원당형 부도나 쌍사자석등의 창의적인 양식 등이 이 시기 불교 미술의 정수를 보여 준다. 한편 월성 동쪽의 안압지에서 보듯이, 인공적으로 만든 거대한 연못과 그에 인접한 호수 기슭의 석축 조성 기법은 고구려의 기술력에 삼국의 문화가 융화하여 조형적으로 발전한 것이다.
고려 때의 석조 문화는 통일신라의 조형미에 지역색을 더하여 더욱 풍부해졌다. 지방에 자리를 잡은 선종 사찰은 지방 불교 문화의 거점 역할을 수행하였다. 지방 사찰들은 지방 장인들의 활동 무대가 되어, 부석사 무량수전 기단에 새겨진 “충원(忠原) 적화면(赤花面) 석수(石手) 김애선(金愛先)”이라는 각자(角字)를 통해 이 시기 석수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지방 사찰에서 왕사(王師)나 국사(國師)를 역임한 고승들이 입적할 경우 중앙 정부에서 국공(國工)을 파견하여 승탑이나 승탑비 등을 건립하도록 하였다. 경기도 여주 고달사지의 원종대사탑비는 광종(光宗, 925~975)이 비신(碑身)을 내린 것으로 비문에 기록되어 있다.
고려는 다종다양한 석조 조형물을 조성하기 위해 석수를 관청 수공업의 직제에 편입시켰다. 『고려사』 식화지(食貨志) 봉록조(俸祿條)의 공장별사(工匠別賜)에 따르면 돌을 다루는 석장(石匠)은 도교서(都校署)에 속해 있었으며 인원은 각 1명이었다. 논산 개태사지(開泰寺址)에서 발굴된 석축은 고려 왕궁인 만월대(滿月臺)의 축조 기술과 버금가는 것으로 평가되어 중앙의 석수들이 참여한 것으로 여겨진다.
조선 초기에는 국가의 체제를 공고히 하기 위해 궁궐을 짓거나 성벽을 수축하는 등 대규모 건축 공사를 벌였고, 공사에서 일할 장인들을 대거 동원하였다. 태조 3년(1394) 한양에 도성을 짓거나 궁궐을 조성하거나 광화문과 숭례문 등 4대문을 세울 때 많은 석수를 동원하여 성을 쌓거나 기단부와 초석을 다듬었다. 세종 3년 12월에 도성을 축성할 때 동원된 공장(工匠)은 총 2,211명이었는데, 이들 중 상당수가 석수였을 것이다.
조선의 석조 문화는 불교를 국시로 했던 고려와 달리 유교를 기반으로 왕릉이나 사대부의 묘 앞에 병풍석, 혼유석, 문인상, 무인상, 석주 등 능묘제와 관련된 다양한 석조물을 조성한 것이 한 특징이었다. 당시 국가적인 공역을 관장할 수 있도록 관청을 설치하고 장인을 소속시키도록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수록하여 제도화하였으며, 궁궐이나 성곽을 세우는 업무를 관장할 선공감(繕工監)에는 석장 40명이 경공장(京工匠)으로 소속되었고, 각 군현의 관아에는 외공장(外工匠)으로 2명의 석장이 소속되어 해당 지역에 성을 쌓거나 건물을 지었다.
조선 후기에 임진왜란으로 불에 탄 궁궐을 중건할 때에는 영건도감을, 왕의 사후 왕릉을 조성할 때에는 산릉도감을 설치하여 운영하였다. 대규모의 건축 공사 때마다 임시로 도감을 설치하여 운영하였고, 그 전말을 수록한 『조선왕실의궤』의 공장질(工匠秩)에는 1600년 선조비 의인왕후의 사후 목릉(穆陵)을 조성할 때부터 1907년 덕수궁의 중화전(中和殿)을 중건할 때까지 307년간 경기 · 충청 · 황해 · 강원 · 전라도에 공문을 보내어 장적(匠籍)에 등록된 석수들을 징발하였다. 조선 후기 『대전통편(大典通編)』이나 『대전회통(大典會通)』에도 석수들은 서울과 지방의 관청에 소속시키고 장적에 올리는 것을 제도화하여 국가적인 석역에 종사하도록 했다고 나와 있다. 당시 도감에 징발되는 석수는 100명 이상으로 많아 도감마다 중복해서 차출하는 인원 또한 많았다. 특히 산릉도감의 대부석소(大浮石所)에 소속된 석수들은 문무석인이나 양호마석을 만들었는데, 현재에도 왕릉에서 그들의 솜씨를 엿볼 수 있다. 조형적인 솜씨가 탁월하고 숙련된 기술을 지녀 30〜40년 이상 장기간 활동한 석수는 그들의 우두머리인 석수 변수(邊首)나 석수 도변수(都邊首)로 성장하며 장인들을 통솔하였다.
17세기 『산릉도감의궤』를 비롯한 의궤 기록에 의하면 품질이 좋은 석재를 얻기 위해 산릉도감의 부석소(浮石所)는 좌우소 부석소로 구분하였고, 그들은 장인명부에 올라 있는 한성부나 지방 장인을 동원하였다. 이 시기에 동원된 석수들은 150여 명이었고 가장 이른 시기의 석수 우두머리인 변수 조말정(趙唜貞, 16011608년 활동)은 이후 형제 간에 가업을 전승하였고, 석수변수 조말룡(曺末龍, 16301660년 활동)은 30년간 활동하여 석수도변수로 성장하였다. 그밖에 17세기 대부석소에서 30〜40년간 부역한 석수들로 박금이동(朴金伊同, 16001634년 활동)은 34년, 하덕성(河德成, 16001634년 활동)은 34년, 백덕환(白德還, 16121645년 활동)은 29년, 유남(柳男, 16301667년 활동)은 37년, 이희선(李希善, 1675~1701년 활동)은 56년간 활동하였다. 이들 석수들은 서울에 거주한 경거장인들로서 이후 변수나 도변수로 성장하였고, 그들이 제작한 조선 후기 왕릉과 왕후릉의 석물들도 현존하고 있다.
18세기 『산릉도감의궤』를 비롯한 의궤 기록에 의하면 대부석소에 동원된 석수들은 100명 내외로 이전보다 줄어들었고, 당시 조성한 석의물도 이전보다 규모가 작아지면서 사실적인 표현이 많아졌다. 17세기 말에서 18세기 초 숙종 대에 활동한 석수로 한이충(16741704년 활동)은 30년, 정몽남(16831731년 활동)은 48년, 이천량(16741719년 활동)은 45년, 오사준(吳士俊, 16881731년 활동)은 43년간 활동하였다. 영조 대에 활동한 석수변수로 우흥민(禹興敏, 17011744년 활동)은 43년, 김천석(金千碩, 17241755년 활동)은 31년, 김유창(金有昌, 17241755년 활동)은 31년, 임유복(任有福, 17531776년 활동)은 23년, 박필심(朴弼心, 17551770년 활동)은 15년, 김대휘(金大輝, 17571789년 활동)는 32년 동안 활동하였다.
특히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 정조 대에서 순조 대에 왕릉이나 왕후릉을 조성한 석수변수들은 면천을 요구하였다. 정유복(鄭有福, 17571801년 활동)과 최득대(崔得大, 17771789년 활동), 한시웅(韓時雄, 17571796년 활동)을 비롯하여, 김대휘(金大輝, 17571789년 활동), 윤시문(尹時文, 17891796년 활동), 권재흥(權才興), 박상길(朴尙吉, 17861816년 활동), 안광현(安光賢, 18231831년 활동), 임원철(林元哲, 18311836년 활동), 장성복(張聖福) 등이 그들이다.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에 활동하였던 석수변수 박상길, 김득대, 박복득, 정유복 등은 면천하고 공명첩까지 받았다.
19세기 대부석소에서 1800년 정조 건릉을 조성한 석수들은 장인 개개인의 이름이 명시되었으나, 이후부터는 대표 석수의 이름만 명기하고 나머지는 패 또는 숫자로 기록되었다. 19세기 중반 산릉도감에 동원된 석수들은 120명 내외로 약간 늘었는데, 이들 중 석수변수 안경석(安景碩, 18211843년 활동)은 22년, 임원철(林元喆, 18301838)은 6년, 김진성(金振聲, 1830~1858년 활동)은 28년간 활동하였는데, 전문성이 달라 근무처도 각각이었다. 안경석은 산릉도감의 소부석소에서 일했고, 임원철은 동원된 햇수는 6년 밖에 안 되지만 6개 도감의 변수 또는 도변수를 지내고 공명첩 상의 자품도 더하고 있다. 석수 김진성은 훈련도감의 군문 장인으로서 대부석소에서 변수에서 경간역이자 석수패장으로 공로를 인정 받아 공명고신첩 상의 품계도 높아졌다.
이처럼 도감에 동원된 석수는 활동 일수에 따라 1·2·3등으로 시상하였는데, 1등 및 2등은 서울 장인에게, 3등은 지방 장인에게 수여되는 경향이 있었다. 17〜18세기에 대부석소 및 소부석소의 석수 중에는 한 집안의 세습적 경향이 다른 장인보다 많이 나타나며, 개인 또한 장기간 동원되는 경향이 많았다. 일부 석수들은 공역이 끝나면 면천되거나 공명첩상의 품계가 가의에 올라가는 경우가 생겼다.
석수는 석기시대부터 돌을 연장으로 사용하였고, 주거와 종교 시설을 짓는 재료로 석재를 적극 활용하였다. 석재는 종류에 따라 갖는 다양한 특성이 있는데, 우리나라는 국토의 25%가 화강암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화강암이 석재로 가장 많이 사용된다. 석수의 치석(治石)은 암반이나 큰 바위에서 돌을 쪼개 내는 할석(割石)과 할석으로 쪼개 낸 석부재를 가공하는 석재 가공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할석은 암반 또는 큰 덩어리 돌에서 계획한 수치의 석재를 갈라내는 작업이다. 할석을 위해 먼저 돌 표면의 크랙(crack)등을 보고 망치를 때려가며 절리를 파악한다. 석재 표면에 대나무를 얇게 깎아 만든 먹칼에 먹을 찍어서 먹선을 긋는다. 먹선이 그린 부분의 석재 표면을 쪼아 쐐기가 들어갈 형상의 복수의 틈(구멍)을 만들고 쐐기를 박아 넣은 뒤 메로 때려 큰 돌을 갈라 작은 돌로 만든다.
일차적으로 가른 석재는 상대적으로 그 크기가 크기 때문에 원래 계획한 규격에 맞추는 작업을 하는데, 이를 소할(小割)이라 한다. 소할을 위해 의도한 자리에 갈라지도록 일정한 간격으로 쐐기 구멍을 뚫고 그 구멍에 쐐기를 박아 넣은 다음에 메나 망치로 일정하게 힘을 주어 가며 의도한 부분에 적절한 갈라짐이 이루어지도록 한다. 소할이 이루어진 석재는 보관이나 마름질 가공을 하는데, 이 작업을 할 인력은 무게에 따라 짝수로 늘어난다. 인력으로 운반할 때에는 목도채와 목도줄을 활용한다. 석재를 목도줄로 묶을 때는 8자 매듭으로 매고, 매듭 고리에 목도채를 건다. 목도채를 걸 때는 8자 매듭이 목도채의 중간에 오도록 한다. 목도채를 맨 사람들이 호흡을 맞춰 석재를 들어 올린 다음 조심스럽게 이동한다.
소할을 통해 갈라낸 석재를 건조물의 부재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마름질로 재단하는 과정을 거친다. 다음으로 석조물의 부재로 요구되는 표면의 마감 정도에 따라 혹두기, 정다듬, 도드락다듬, 잔다듬, 갈기 등의 가공 과정을 거친다.
첫째, 마름질은 석재를 계획한 규격의 크기로 가공하는 과정이다. 소할 작업을 통해 갈라낸 석재는 표면이 울퉁불퉁하고 거친 상태로 있다. 이러한 석재는 대강의 크기로 떠낸 마름돌이다. 목표로 하는 형태에 맞추어 가공하기 위해 먹선을 놓는다. 먹선을 놓은 뒤에는 석재에서 먹선 밖의 제거 부분을 털이개를 사용해 갈라낸다. 갈라낼 부분인 먹선에 적절하게 맞추어 털이개를 대고 망치로 타격해 재단을 한다.
둘째, 혹두기는 마름질을 한 석재 면에 도드라져 튀어나온 부분을 털이개나 쇠메, 정 등을 이용하여 표면을 가공하는 과정이다. 혹두기는 혹떼기나 겉다듬, 메다듬 등으로도 불린다. 마름돌 주위에 먹선을 그어 마무리선 또는 맞댄 면을 정하고 먹선을 털이개를 대고 타격해 맞댄 면 갓둘레를 평면선으로 따낸 후 가공한다. 석재 면의 중앙부가 가장자리보다 오목하거나 볼록하지 않게 가공하는 혹두기 공정을 거치면 부재의 계획된 형상이 어느 정도 만들어지게 된다.
셋째, 거친정다듬은 석재 표면의 요철을 정리하는 가공 과정이다. 혹두기 공정을 통해 걷어낸 석재의 요철 표면에 끝날이 뾰족한 정을 대고 쇠메로 때려가며 상대적으로 큰 요철을 떼어 낸다. 이 과정을 거치면 어느 정도 석재의 표면이 정리되기 시작한다.
넷째, 고운정다듬은 석재의 표면에 남아 있는 요철을 점차 작게 만드는 과정이다. 이 단계를 거친 석재를 멀리서 보면 평탄한 가공면으로 느껴지지만, 작은 정 자국이 표면에 남아 있다.
다섯째, 도드락다듬은 정으로 쪼아낸 부분의 작은 요철을 도드락망치를 사용해 더 잘게 부숴 평탄한 면으로 바꾸는 과정이다. 도드락다듬은 여러 개의 도드락망치를 사용해 작업하는데, 처음에 쓰는 도드락망치는 날눈이 25눈 정도이다. 이후 상대적으로 날눈 크기가 촘촘한 64눈 도드락망치를, 다시 100눈 도드락망치를 사용해 표면을 정연하게 가공한다.
석조의 시공 분야는 석탑, 석등, 기단, 석축, 성곽, 담장 등 매우 다양하다.
첫째, 석축은 돌로 만든 축대(築臺)이다. 건축과 매우 밀접한 구조물로 건물을 지을 때 수평을 이루도록 건물터를 마련한다. 치수(治水)나 성곽을 쌓을 때 지반을 안정적으로 보강해야 할 경우에도 석재를 다듬어 쌓는다. 기초를 다듬은 다음 지대석을 놓을 때 해당 위치에 면석의 기울기를 확인한다. 지대석은 크기도 가장 커야 하며 뒷뿌리도 충분히 길어야 한다. 지대석이 고정되면 빈틈이 남지 않도록 강회몰탈을 지대석 하부에 채워 넣는다. 지대석과 뒷채움을 설치한 다음 지대석 위로 면석을 쌓아 올라간다.
석축은 아래쪽이 하중과 토압을 많이 받는 구조이므로 아래쪽으로 갈수록 돌의 크기를 크게 하여 석축의 안정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쌓는다. 면석은 설치한 규준틀을 기준으로 삼아 한 단씩 쌓아 올린다. 면석을 놓을 때에는 지대석과 마찬가지로 제 위치에 놓은 다음에는 지렛대를 사용하여 외부 면의 기울기를 맞춘다. 기울기를 맞춘 다음에는 이를 고정하기 위해 쪽돌을 뒤쪽에 고아 놓는다. 면석의 좌우 측면은 돌출 부위를 정으로 쪼아 제거한다. 외부 면석을 안정적으로 설치한 다음에는 후면에 뒷채움석을 놓는다. 계획한 높이로 석축을 쌓은 다음에는 최종적으로 상부 면을 마감한다.
둘째, 성곽은 외부로부터 내부를 보호하기 위해 만든 군사적 목적의 구조물이다. 우리나라는 삼국시대 때부터 견고한 석성을 쌓은 것으로 유명하다. 성곽 쌓기에 필요한 자재는 부위별로 기초, 면석, 뒷채움, 미석, 성상부 마감재, 여장 지대석, 여장 등으로 분류된다. 기초는 호박돌, 진흙, 강회, 모래 등 잡석다짐을 한다. 면석과 뒷채움은 석재를 사용하는데 면석은 대체로 바른 면이 하나 있는 큰 돌을 사용하고 뒷채움은 부정형의 호박돌을 사용한다. 면석 중에는 뒷뿌리가 긴 심석을 간간이 사용하므로 심석도 준비한다. 미석은 성곽 면석의 상단부에 설치하는 돌로 면석과 여장의 분기점이 된다. 미석은 외부로 돌출되게 설치한다. 성상부 마감재는 흙과 강회를 섞어서 바닥 포장용 진흙몰탈로 단단하게 되도록 한다. 여장 지대석은 일정한 높이를 갖춘 돌로 준비하여 바닥을 나무달고로 단단하게 다진다.
궁궐 건물의 기단이나 성곽을 쌓고, 석불이나 석탑, 석등과 같은 석조물을 제작하는 석수의 역사적, 기술적 우수성을 전승하기 위해 문화재청(현, 국가유산청)에서는 석장을 2007년 국가무형문화재 제120호(현, 국가무형유산)로 지정하였다. 기능을 가진 보유자로 이의상(1942년생)과 이재순(1955년생)을 인정하였다. 한편 지방에서도 석수의 전통 제작 기술을 시도무형문화재(현, 시도무형유산)로 지정하였다. 석장 박찬봉(1952년생, 2005년 경기도 무형문화재 제42호(현, 경기도 무형유산)), 석장 김옥수(1954년생, 2006년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36호(현, 전북특별자치도 무형유산)), 보령석장 고석산(1955년생, 2013년 충청남도 무형문화재 제48호(현, 충청남도 무형유산))이 각각 지정되어 전통 기능을 전승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