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유석은 ‘영혼이 노는 돌’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혼유석이라는 명칭은 임진왜란 이후에 사용되었다. 의례서와 『산릉도감의궤』의 기록에 따르면 상(床)과 다리의 구조를 설명할 때는 석상(石床)과 족석(足石)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이 석물(石物)의 성격을 언급할 때는 혼유석과 고석(鼓石)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
혼유석의 기원은 통일신라시대의 제사 시설인 제단(祭壇)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고려에서는 공민왕 부부의 현정릉처럼 정자각이 건립되면서 제사 음식을 차리는 상의 기능은 상실하였으나, 봉분 앞에 직육면체 형태의 석상은 그대로 설치했다. 이러한 능 형식이 조선의 왕릉으로 이어졌다. 처음에 조선시대 무덤은 상석만 설치했으나, 16세기 후반 이후 혼유석이 추가되었으며 17세기 이후에는 묘표(墓標)와 향로석(香爐石)까지 일렬로 설치되었다.
혼유석은 직육면체의 단순한 형태이다. 표면에 조각 장식은 없으나 능침(陵寢) 석물의 경우 표면을 갈아 광택을 내며 정성 들여 제작했다. 조선 왕릉에서 무게가 많이 나가는 혼유석은 12톤 정도일 만큼 능상(陵上) 석물 중에서 가장 무겁다. 혼유석이 놓인 위치는 봉분 바로 앞 정중앙인데, 석실(石室)의 남쪽 한가운데이며 그 뒤쪽이나 아래쪽에 지석(誌石)을 묻어 두기도 한다. 혼유석은 4개 혹은 5개의 둥근 형태의 족석(足石) 위에 올려져 있다. 족석의 표면에 나어두(羅魚頭)를 새겨 넣어 잡귀의 접근을 차단하고자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