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접

의생활
물품
머리 손질에 필요한 빗 · 빗솔 · 빗치개 등을 넣어 두는 그릇. 소첩(梳貼). 소함(梳函). 소갑((梳匣), 소첩함(梳貼函).
이칭
이칭
소첩(梳貼), 소함(梳函), 소첩함(梳貼函), 소갑((梳匣), 빗접고비, 경대
물품
재질
종이(유지|창호지)|나무|나전|화각
용도
생활용|보관용|의례용|수납구|명기
소장처
국립민속박물관 등
제작 시기
조선 시대
관련 의례
국혼|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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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빗접은 머리 손질에 필요한 빗·빗솔·빗치개 등을 넣어 두는 그릇이다. 빗접은 만드는 재료가 다양하고 그에 따라 형태가 달라져 부르는 명칭도 달라진다. 기름에 절은 종이를 사용하여 납작하게 만든 제품은 빗접이고, 이것을 한자어로 소첩(梳貼)이라고 한다. 빗을 비롯하여 여러 관련 도구까지 넣을 수 있게 만든 것은 소함(梳函) 혹은 소첩함(梳貼函) 및 소갑((梳匣)이다. 빗접을 벽걸이 형태의 고비에 꽂아서 사용하거나 고비로 만든 것은 빗접고비이다.

정의
머리 손질에 필요한 빗 · 빗솔 · 빗치개 등을 넣어 두는 그릇. 소첩(梳貼). 소함(梳函). 소갑((梳匣), 소첩함(梳貼函).
연원

빗접을 언제부터 만들어 사용했는지는 알 수 없다. 이와 관련된 조선 초기의 기록에서는 소함(梳函)을 먼저 찾을 수 있다. 1420년(세종 2) 태종비 원경왕후국장 때 왕후릉을 조성하고 현궁 동남쪽에 진열하는 복완 중에 참빗[眞梳] 1개와 얼레빗[木梳] 1개를 담은 나전소함(螺鈿梳函) 1채를 두었다. 이것이 전례가 되어 『세종실록오례』와 『국조오례의』에 수록되어 이후 국장 때마다 나전소함을 넣는 것이 정례화되었다.

빗접의 한자어인 소첩(梳貼)은 1608년 선조의 국장 때 그 전말을 기록한 『선조국장도감의궤』에서 처음 확인된다. 이때 빗접과 함께 나전소함(螺鈿梳函)과 경갑(鏡匣)을 함께 제작하였는데, 이들이 각각 다른 용도였음을 알 수 있다. 왕이나 왕비의 국장 때마다 소함과 경갑을 제작하여 현궁(玄宮)에 명기(明器)로 안치하였다. 종이로 만든 빗접에는 참빗얼레빗을 넣었고, 나무로 백골을 짜고 자개를 붙이고 칠한 소함에는 빗접과 함께 다른 화장 도구를 넣었으며, 경갑은 구리거울과 거울받침[鏡臺]을 넣는 것임을 알 수 있다.

17세기에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경상북도 김천 문당동 유적에서 출토된 빗접은 현재 국립대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발굴 당시 1층 서랍에 백자 대접 2점, 2층에 기름병, 연지 접시, 떨잠, 청동 거울, 동전 등이 함께 발견되었다. 이를 통해 국장뿐 아니라 사대부가의 장례 때에도 빗접을 매장한 사실과 함께 빗접에는 다양한 종류의 화장용 물품을 수납했음을 알 수 있다.

조선 후기의 기록에서는 왕과 왕후의 국혼 때마다 빗접을 비롯하여 소첩함, 휘건첩(揮巾貼), 수건첩(手巾貼), 세수 소함(洗水小凾) 및 칠함(㓒凾) 등을 제작하여 별궁에 미리 비치하였다. 1638년 인조장렬왕후의 국혼을 비롯하여 1651년 현종을 세자로 책봉할 때, 1681년 숙종인현왕후의 국혼 때, 1702년 숙종인원왕후의 국혼 때, 1727년 진종과 효순왕후의 국혼 때, 1831년 헌종효정왕후의 국혼 때 그렇게 하였음을 의궤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때 빗접에는 참빗과 얼레빗을 넣었고, 소첩함에는 빗접과 함께 돼지털솔[猪毛省]과 빗치개[梳次介]를 넣었다.

형태와 제작 방식

1608년 『선조국장도감의궤』 「이방의궤」의 기록에서 빗접과 소함 및 경갑을 제작할 때 사용한 재료 및 크기와 제작 방식을 확인할 수 있다. 빗접은 자문지(咨文紙)의 안쪽에 장지(壯紙)를 붙여 만들었다. 소함은 자작나무[椴木]로 길이 7치 5푼, 너비 6치, 높이 2치의 상자를 만들고 그 위에 대합조개를 붙이고 전칠 3홉을 올렸으며 안쪽은 홍릉 1자를 발랐다. 구리거울을 넣는 경갑도 자작나무로 만들며 주칠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빗접의 재료는 두꺼운 한지이다. 빗접은 창호지를 여러 겹 붙여서 장지처럼 두껍게 만든 다음 여기에 기름을 먹인 유지(油紙)로 만들어 사용한다. 빗접고비는 가는 나무 오리를 장방형으로 짜서 앞뒤에 종이를 바르고 앞쪽에 다시 두꺼운 종이로 틈이 뜨게 붙여 그 틈에 빗접을 꽂게 만든 것이다. 빗접이나 빗접고비는 종이로 만든 반면 소갑이나 소함은 목제로 만든다. 소갑은 납작한 상자형이고 소함은 2~3층의 함 형태이다. 소갑의 크기는 작은 것은 목침만 하지만, 부녀자가 사용하는 것은 대개 그보다 커서 1자에 달하며, 운각의 장식적인 다리를 붙이기도 한다. 소갑은 납작한 벼루집[硯匣] 모양으로 만들고 뚜껑에는 첩지(貼紙)를 붙이고 황동이나 백통 고리를 달아 칠을 하거나 자개를 박아 호사스럽게 꾸민다. 소함은 갑을 아래위 두 칸으로 하여 반닫이 서랍을 달고, 위 서랍에는 빗과 빠진 머리카락을 모아 두는 주머니 등을 넣고 아래 서랍에는 분과 기름을 넣도록 만든 것이다. 부녀자용 소갑이나 소함에는 주칠을 하고, 나전이나 화각으로 화려한 문양을 시문하기도 한다. 남자용의 소갑은 오동나무로 만들어 표면을 인두로 지지거나 흑칠을 하기도 한다.

변천 및 현황

조선 왕실에서 왕과 왕후의 국혼이 있을 때 그 전말을 기록한 『가례도감의궤』에 의하면 빗접과 소첩함, 휘건첩, 수건첩, 소함 등을 세수를 하고 머리카락을 간추릴 수 있도록 미리 제작하여 별궁에 배치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풍습이 민간에까지 확산되었는데, 『산림경제』에 의하면 여성의 혼수품으로 빗접과 장함(粧函)을 별개로 다루었다. 빗접에는 참빗 · 얼레빗 · 빗솔 · 빗치개 등을 넣어 두었고, 장함에는 분 · 기름 · 밀 · 거울 등을 수장하여 사용한 것을 알 수 있다.

17세기 옥담 이응희(李應禧, 1579~1651년)가 쓴 옥담시집(玉潭詩集)을 보면 만물을 노래한 「만물편(萬物篇)」이 있는데, 여기에는 백과사전처럼 25종의 유형을 설정하고 그 아래 280개의 사물을 나열하여 해당 사물에 대한 시를 붙였다. 그중 「패용류」에서는 노리개 · 수건 · 부채 · 빗접 · 지팡이 · 빗 · 도(刀) · 검(劍) · 활 · 화살 등 당시 선비들이 지니고 다니던 10종의 사물에 대해 시를 지었다. 이를 통해 빗접은 남성의 필수 용구였음을 알 수 있는데, 특히 남성용에는 빠진 머리카락을 모아 두는 퇴발낭(退髮囊)을 빗이나 빗치개 및 빗솔과 함께 넣어 수납하기도 했다.

『임원경제지』에는 거울을 넣은 경함(鏡函)이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구리거울과 함께 이를 받치는 경대(鏡臺)를 받쳐 화장 도구를 넣는 장함에 거울이 추가된 형식으로 발전한 것이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오늘날의 경대는 빗접과 장함의 기능을 함께 하는 것과 비교된다. 현재 국립민속박물관 등에 현존하는 빗접 유물을 보면 기름 먹인 종이를 사용해서 가로와 세로로 각각 세 번씩 접은 것인데, 그 접은 자국이 ‘井’자 모양이다. 크기는 일정하지 않고 마음대로 한다.

참고문헌

원전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선조국장도감의궤(宣祖國葬都監儀軌)』
『산림경제』
『임원경제지』
『조선왕조실록』

단행본

전완길, 『한국화장문화사(韓國化粧文化史)』(열화당, 1987)

논문

박진경, 「조선 후기 유리거울의 수입과 공예품의 특징」(『문화재』 52-4, 국립문화재연구소,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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