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목왕(忠穆王, 13371348, 재위 13441348) 왕흔(王昕)은 충선왕(忠宣王)의 장남이며, 어머니는 원나라 덕녕공주(德寧公主)이다. 8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라 어머니가 섭정을 하였는데 재위 4년만인 1348년(충목왕 4) 12월 정묘일에 김영돈(金永旽)의 집에서 세상을 떠났고, 그다음 해인 1349년 3월에 명릉(明陵)에 묻혔다. 그의 신주는 24개월간 혼전에 두었다가 1351년(충정왕 3) 2월 임오일에 태묘에 부묘되었다.
1348년(충목왕 4) 12월 충목왕은 나이 12세로 승하하여, 다음 해인 1349년 3월 정유일 개성부의 서쪽 10리에 있는 만수산의 남쪽 산록에 장례를 지냈다. 명릉은 개성특별시에서 서쪽으로 10리 떨어진 만수산의 남쪽 산록에 평지보다 약 10m 높이에 조영하였다. 능역(陵域)은 협소하며 경사가 비교적 급한 산기슭을 깎아내리고 돋아 축조하였다.
조선시대에 들어 고려왕릉의 관리가 부실하여 고려왕릉 중 능주를 알 수 없는 경우가 많아졌고 충목왕의 명릉도 마찬가지이다. 조선 중종 때에 편찬된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에 의하면 만수산 남쪽 산록 중간 지점에 3기의 무덤이 있고 이것들을 속칭 ‘'명릉’으로 불렀지만, 3기 중 어느 것이 충목왕의 명릉인지는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조선 현종 때인 1662년(현종 3)에 고려왕릉을 조사할 때에도 마찬가지여서 충목왕 명릉을 비롯한 3기의 무덤이 연달아 존재하여 이곳의 지명을 연릉리라 부르고 ‘명릉떼 3릉’으로 불렀다. 당시 조사한 바에 의하면 명릉떼 3기의 무덤은 모두 많이 훼손되어 있었고, 사면 석물이 서 있는 것도 있지만 물러난 것도 있었다.
제1층단에는 중심 부분에 봉분이 있는데 서쪽으로 약간 치우친 남향이었다. 봉분은 기단석을 12각형으로 깔아 놓고, 그 위에 병풍석을 두른 다음 조성하였으며, 정자각의 흔적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려왕릉을 관리하고자 1818년(순조 18)에 표석을 세웠고, 1867년(고종 4)에도 마찬가지였다.
명릉떼 1릉의 봉분 정면 중앙에는 1867년에 세운 표석이 서 있지만, 현재는 세 동강이 나 있던 것을 붙여서 세운 것이다. 일제강점기인 1916년 명릉에 대해 조사를 하였으며, 일제강점기에는 두 차례나 도굴을 당하였다.
광복 이후 명릉을 비롯한 3기의 무덤 소재지는 경기도 개풍군 중서면 여릉리 명릉동이었으나, 현재는 개성특별시 개풍군 연릉리 명릉동으로 지명이 바뀌었다. 명릉은 연릉리 소재지로부터 북쪽으로 1.5㎞ 떨어져 3기의 능이 연달아 자리 잡고 있는데, 제1릉부터 제2릉은 약 400m, 제2릉부터 제3릉까지는 약 500m 정도 떨어져 있다.
1963년 명릉떼 1릉의 동쪽으로 도굴되어 노출된 상태여서 북한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에서 발굴 조사를 하게 되었다. 이를 통해 명릉떼 1릉의 내부에서 벽화가 발견되었기 때문에, 현재는 명릉떼 1릉을 충목왕 명릉으로 본다. 발굴 조사 후에는 명릉의 병풍석을 잡석으로 쌓아 원형에 가깝게 만들어 놓았다.
명릉의 구조와 형태는 북한 당국에 의해 여러 차례 실시된 실측 조사를 통해 알려져 있다. 명릉떼 1릉은 제1단 중앙에 봉긋하게 솟은 봉토가 있고 그 아래쪽에는 병풍석이 있으며 그 주위를 빙둘러 난간석을 배치하고 있다. 봉분의 네 귀퉁이에는 석수를 배치하고, 제2단에는 석인을 세우며, 제3단에는 정자각을 세우는 구조이다.
1963년 북한 당국이 실측한 바에 의하면 명릉은 봉토의 높이는 243㎝, 주위 둘레는 27m였는데, 2008년의 봉토의 높이는 230㎝, 직경은 800㎝이다. 봉토의 둘레에는 병풍석이 둘러쳐져 있으며, 병풍석은 면돌, 이마돌, 모서리돌, 지대석으로 이루어져 있다. 병풍석의 높이는 90㎝인데, 그중 이마돌의 높이는 30㎝이고 면돌의 높이는 60㎝이다. 면돌에는 십이지신상이 조각되어 있었으나 오랜 세월로 인해 마모되어 알아보기 어렵다.
난간석은 병풍석에서 앞으로 110㎝ 지점에 그와 병행하여 12각으로 설치하였다. 현재 난간석주 12개와 동자석주 12개가 모두 남아 있는데, 자연 풍화로 파손이 심하고 그중 여러 개는 금이 가거나 패어 있다. 난간석주의 높이는 140㎝ 전후이다.
동자석주는 매몰된 상황이 같지 않아 지면에 드러난 높이에서 큰 차이를 보이고 있으며 그 높이는 작은 것이 65㎝에서 큰 것은 120㎝ 정도 된다. 난간 가로대는 대부분 난간석주와 동자석주 사이의 땅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석조각의 경우 1963년 조사 당시에는 봉분의 네 귀퉁이에 석수 4구가 바깥을 향해 앉아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모두 없어졌다. 문석인 또한 하나도 남은 것이 없고, 정자각의 흔적도 확인되지 않는다.
1963년에 북한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에서 발굴 조사한 바에 의하면, 능의 동쪽으로 도굴되고 노출되어 있었다고 한다. 발굴 결과 주검칸[현실(玄室)]의 방향은 남향이며 반지하에 놓여 있다. 주검칸의 남북의 길이는 265㎝, 동서의 너비는 240㎝, 높이는 170㎝이다. 천장은 고임천장이며 바닥의 중심에는 관대가 놓여 있다.
관대는 곱게 잘 다듬은 화강석으로 길이 230㎝, 높이 87㎝, 두께 31㎝이다. 관대 양옆에는 유물 받침대가 있었는데, 길이 240㎝가 되는 가공한 길쭉한 돌로 되어 있다. 남쪽에는 문이 있으며 두께 약 40㎝ 되는 큰 돌로 주검칸을 막았다. 벽에는 벽화를 그렸는데 북벽에는 연꽃을 그리고 그곳에 날아드는 나비를 그렸다. 천장에는 별 그림이 약간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