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로가 해동기로회(海東耆老會)의 말석에 참석하여 기로(耆老)들이 주고받은 시문과 잡저(雜著)를 3권으로 엮은 것이다. 줄여서『쌍명재집』이라 부르기도 한다.
최당(崔讜, 1130∼1211)이 평장사(平章事)로 벼슬에서 물러난 후 자신이 사는 집을 쌍명재(雙明齋)라 편액(扁額)하고 장자목(張子牧), 이준창(李俊昌), 백광신(白光臣), 고영중(高瑩中), 이세장(李世長), 현덕수(玄德秀), 최선(崔詵), 조통(趙通) 등 전현직 고관들과 해동기로회를 열었는데, 이인로가 52세의 나이로 그 말석에 참여하여 기로들이 지은 시문과 그들의 시에 화차운(和次韻)한 다른 사람들의 시문을 합쳐『쌍명재시집』으로 편찬하였다. 이인로가 시집의 서문(序文)을 썼으며, 최당의 인척인 홍사윤(洪思胤)이 흥왕사(興王寺)를 관장할 때 조정의 뜻을 받들어 교장당(敎藏堂)에서 판각하였다. 또 이인로는 쌍명재의 기문(記文)을 지었으며, 장자목이 쌍명재의 편액을 썼다.
현전하지 않아 서지적 사항은 알 수가 없다. 『쌍명재시집』에 관한 기록은 「파한집발(破閑集拔)」,『동문선(東文選)』권83「쌍명재시집서(雙明齋詩集序)」,『고려사(高麗史)』권102「이인로열전(李仁老列傳)」,『용재총화(慵齋叢話)』권8,『해동문헌총록(海東文獻總錄)』의「제가시문집(諸家詩文集)」등에 보인다.『해동문헌총록』에는 쌍명재의 주인인 최당의 문집으로 기록되어 있다.
시집의 구체적인 내용을 알 수가 없지만, 이인로는 그 작품들이 우아하고 아름다워서 후세에 전할 만하다고 하였다. 이전(李佺)이 그린 해동기로도(海東耆老圖)에 대한 설명을 미루어, 기로들이 시와 거문고와 술과 바둑으로 풍류를 즐기며 소요자적(逍遙自適)하는 흥취를 주로 읊었을 것으로 보인다. 당시 사람들은 그들을 지상선(地上仙)이라 부르며, 그들의 시에 차운(次韻)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쌍명재시집』은 개인의 문집이 아니라, 기로회라는 동호회(同好會) 내지 시사(詩社)와 관련한 최초의 시문집이라고 평가할 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