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가 예종의 궁인(宮人)의 딸이었다. 1183년(명종 13) 형부시랑(刑部侍郎)으로 있을 때 참소를 받아 죽임을 당할뻔하였으나 왕의 도움으로 무사할 수 있었는데, 일찍이 남의 토지를 빼앗았다가 원한을 샀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다.
1185년에는 태복경(太僕卿)에 올랐는데, 국제(國制)에 의하면 궁인의 자손은 7품에 한품(限品)되고 과거에 급제한 경우에도 5품을 넘지 못하도록 되어 있었으나, 이때 3품직에 제수되었어도 간관(諫官)들이 두려워하여 반대하지 못하였다.
1196년 추밀원사(樞密院使)를 지냈고, 그뒤 수사공(守司空)으로 치사(致仕)하였다. 치사한 뒤로는 최당(崔讜)·최선(崔詵)·장자목(張自牧)·백광신(白光臣)·고영중(高瑩中)·이세장(李世長)·현덕수(玄德秀)·조통(趙通) 등과 더불어 기로회(耆老會)를 만들고, 한가로이 즐기며 지내니 당시 사람들이 이들을 지상신선(地上神仙)이라 일컬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