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全州) 옥구현(沃溝縣) 사람으로, 자(字)는 여회(如晦)이다. 옥구고씨(沃溝高氏)의 시조로 알려져 있다. 아버지는 감찰어사(監察御史)를 역임한 고돈겸(高惇謙)이며, 어머니는 군기주부(軍器主簿) 박현인(朴玄仁)의 딸이다. 아내는 검교태자사사(檢校太子司事) 이양서(李陽舒)의 딸이며, 슬하에 조청대부(朝請大夫) 예빈경(禮賓卿)을 역임한 고정(高侹) 등 6남 2녀를 두었다. 1208년(희종 4) 9월 상순일에 병으로 집에서 죽었다. 9월 23일 하원군(河源郡) 북쪽 기슭에서 화장으로 장례를 치른 뒤, 유골은 약 1년 뒤인 1209년(희종 5) 15일 송림현(松林縣) 동쪽에 묘소를 마련하여 매장되었다.
국자감(國子監)의 남성시(南省試)에서 “나라는 지극히 공정한 기구이다”라는 시로 시험을 치러 1등을 한 뒤, 1164년(의종 18)의 과거에 급제하였다. 그 뒤 황주목사(黃州牧使) 겸 장서기(掌書記)로 치적을 쌓았으며, 국학학정(國學學正), 사문박사(四門博士)등을 역임하였다. 1174년(명종 4) 조위총(趙位寵)의 난(亂) 중에 금(金)나라에 사신을 파견할 때 서기관(書記官)으로 임명되어 사명을 다하였으며, 돌아온 뒤 그 공으로 대관서령(大官署令) 겸 직사관(直史館)이 되었다.
이어 추밀원당후관(樞密院堂後官), 감찰어사(監察御史), 예부원외랑(禮部員外郞), 병부낭중(兵部郞中), 이부낭중(吏部郞中) 국자사업(國子司業), 중서사인(中書舍人) 지제고(知制誥) 겸 국학직강(國學直講), 병부시랑(兵部侍郞) 등을 역임하였다. 1199년(신종 2) 겨울 예빈경(禮賓卿)에 임명되었으며, 1200년(신종 3)에는 예빈경으로서 남성시를 주관하여 진화(陳澕) 등을 선발하였다.
1202년(신종 5)에 여러 차례 글을 올려 사직하기를 청하여 조산대부(朝散大夫) 예빈경(禮賓卿) 동궁(東宮) 시강학사(侍講學士)의 관직으로 은퇴하였다. 그 뒤 최당(崔讜) · 최선(崔詵) · 장자목(張自牧) · 이준창(李俊昌) · 백광신(白光臣) · 이세장(李世長) · 현덕수(玄德秀) · 조통(趙通) 등 8인과 함께 해동기로회(海東耆老會)를 결성하고 교류하였으며, 바위에 구로회(九老會)라고 새겨 세상에 알렸다. 당시 사람들이 이들을 지상의 신선[地上仙]이라 불렀다고 한다. 해동기로회의 다른 회원과 마찬가지로 최충헌 정권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었다.
일찍부터 문장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남성시를 주관하고 다섯 번이나 사신으로 갈 수 있었던 것도 그가 글을 잘 썼기 때문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