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영중 ()

고려시대사
인물
고려 후기 무신집권기에 활동한 문신 관료로 은퇴한 후 해동기로회를 결성하여 활동한 인물.
이칭
여회(如晦)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133년(인종 11)
사망 연도
1208년(희종 4)
본관
옥구(沃溝)
주요 관직
예빈경|동궁 시강학사
내용 요약

고영중은 고려 후기 무신집권기에 활동한 문신 관료로 은퇴한 후 최당 등 8인과 함께 해동기로회를 결성하여 활동한 인물이다. 1164년(의종 18)의 과거에 급제한 뒤 여러 관직을 거쳐 조산대부 예빈경 동궁 시강학사의 관직으로 은퇴하였다.

정의
고려 후기 무신집권기에 활동한 문신 관료로 은퇴한 후 해동기로회를 결성하여 활동한 인물.
가계 및 인적 사항

전주(全州) 옥구현(沃溝縣) 사람으로, 자(字)는 여회(如晦)이다. 옥구고씨(沃溝高氏)의 시조로 알려져 있다. 아버지는 주1를 역임한 고돈겸(高惇謙)이며, 어머니는 군기주부(軍器主簿) 박현인(朴玄仁)의 딸이다. 아내는 검교태자사사(檢校太子司事) 이양서(李陽舒)의 딸이며, 슬하에 조청대부(朝請大夫) 주2을 역임한 고정(高侹) 등 6남 2녀를 두었다. 1208년(희종 4) 9월 상순일에 병으로 집에서 죽었다. 9월 23일 하원군(河源郡) 북쪽 기슭에서 화장으로 장례를 치른 뒤, 유골은 약 1년 뒤인 1209년(희종 5) 15일 송림현(松林縣) 동쪽에 묘소를 마련하여 매장되었다.

주요 활동

국자감(國子監)주3에서 “나라는 지극히 공정한 기구이다”라는 시로 시험을 치러 1등을 한 뒤, 1164년(의종 18)의 과거에 급제하였다. 그 뒤 황주목사(黃州牧使) 겸 장서기(掌書記)로 치적을 쌓았으며, 국학학정(國學學正), 사문박사(四門博士)등을 역임하였다. 1174년(명종 4) 조위총(趙位寵)의 주4 중에 금(金)나라에 사신을 파견할 때 서기관(書記官)으로 임명되어 사명을 다하였으며, 돌아온 뒤 그 공으로 대관서령(大官署令) 겸 직사관(直史館)이 되었다.

이어 추밀원당후관(樞密院堂後官), 감찰어사(監察御史), 예부원외랑(禮部員外郞), 병부낭중(兵部郞中), 이부낭중(吏部郞中) 국자사업(國子司業), 중서사인(中書舍人) 지제고(知制誥) 겸 국학직강(國學直講), 병부시랑(兵部侍郞) 등을 역임하였다. 1199년(신종 2) 겨울 예빈경(禮賓卿)에 임명되었으며, 1200년(신종 3)에는 예빈경으로서 남성시를 주관하여 진화(陳澕) 등을 선발하였다.

1202년(신종 5)에 여러 차례 글을 올려 사직하기를 청하여 조산대부(朝散大夫) 예빈경(禮賓卿) 동궁(東宮) 시강학사(侍講學士)의 관직으로 은퇴하였다. 그 뒤 최당(崔讜) · 최선(崔詵) · 장자목(張自牧) · 이준창(李俊昌) · 백광신(白光臣) · 이세장(李世長) · 현덕수(玄德秀) · 조통(趙通) 등 8인과 함께 해동기로회(海東耆老會)를 결성하고 교류하였으며, 바위에 구로회(九老會)라고 새겨 세상에 알렸다. 당시 사람들이 이들을 지상의 신선[地上仙]이라 불렀다고 한다. 해동기로회의 다른 회원과 마찬가지로 최충헌 정권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었다.

학문과 저술

일찍부터 문장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남성시를 주관하고 다섯 번이나 사신으로 갈 수 있었던 것도 그가 글을 잘 썼기 때문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원전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고영중묘지명(高瑩中墓誌銘)」
「김수 처 고씨묘지명(金須妻高氏墓誌銘)」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졸고천백(拙藁千百)』 권 1, 「해동후기로회서(海東後耆老會序)」

논문

박종진, 「고려시기 해동기로회(海東耆老會)의 결성과 활동」(『역사와 현실』 66, 한국역사연구회, 2007)
주석
주1

고려시대에, 어사대 또는 감찰사(監察司)에 속한 종육품 벼슬. 성종 14년(995)에 사헌대를 어사대로 고치면서 처음으로 설치하였으며, 이후 감찰사헌, 감찰사(監察司), 감찰규정, 감찰내사 따위로 여러 번 고쳤다.    우리말샘

주2

고려시대 예빈시(禮賓寺)에 속해 있는 종3품 벼슬.

주3

고려시대에, 국자감에서 진사를 뽑던 시험. 시험 과목은 부(賦)와 시(詩)이며, 최종 고시인 예부시(禮部試)를 보조하는 예비 고시로 조선 시대의 소과(小科)에 해당한다.    우리말샘

주4

고려 중기의 문신(?~1176). 의종 24년(1170)에 정중부, 이의방 등이 정변을 일으켜 의종을 폐하고 명종을 옹위한 후 전횡을 일삼자 자비령(慈悲嶺) 이북의 40여 개 성과 합세하여 군대를 일으켰으나 패하여 참형을 당했다.    우리말샘

주5

고려시대에, 지금의 황해도 지역에 둔 행정 구역. 성종 14년(995)에 제정하였다가 십도제(十道制)를 실시할 때 관내도에 소속되었고, 헌종 9년(1018)에 개편되었다.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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