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달(興達)의 가계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으며, 929년(태조 12)에 사망하였다.
후삼국 시기에 현재의 경상북도 문경(聞慶) 지역에 자리한 고사갈이성(高思葛伊城)의 성주(城主)이다. 원래 견훤(甄萱)의 휘하에서 고사갈이성의 성주로 지내고 있었지만, 927년(태조 10)에 고려 태조 왕건(王建)이 지금의 경상남도 진주(晉州)인 강주(康州)를 순행할 목적으로 그 경로상에 있는 이 지역을 지나가게 되자 자기 아들을 보내어 귀순하였다. 이를 계기로 후백제에서 성에 배치한 군사와 관리들이 모두 고려에 항복하였다.
흥달의 귀순으로 고려는 지금의 충청북도 충주(忠州) 방면에서 경상도 지역으로 향하는 진군로를 안전하게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고려는 925년(태조 8)에 지금의 경상북도 영천(永川) 지역인 고울부(高鬱府)를 확보하였을 뿐만 아니라, 지금의 경상북도 성주(星州) 지역인 벽진군(碧珍郡)을 확보하고 있었으며, 더불어 흥달이 귀순하기 몇 개월 전에 고사갈이성에서 가까운 지금의 경상북도 문경에 자리한 근품성(近品城)을 함락시킨 데 더해 고사갈이성을 확보함으로써 경상북도 일대에 대한 지배를 공고히 할 수 있었다.
이에 태조는 흥달에게 청주(靑州)의 녹읍을 하사하고, 토지와 집을 하사하여 치하였으며, 아들 준달(俊達)에게는 진주(珍州) 녹읍을, 웅달(雄達)에게는 한수(寒水) 녹읍을, 옥달(玉達)에게는 장천(長淺) 녹읍을 각각 하사하였다.
하지만 견훤의 후백제군은 곧바로 반격을 가하여 927년 9월에 근품성을 공격하여 불사른 데 이어 지금의 대구시에 자리한 공산전투(公山戰鬪)에서 왕건이 이끄는 고려군을 대파하였다. 929년(태조 12)에 견훤이 고사갈이성에 대한 공격을 추진하였는데, 이 소식을 들은 흥달은 전투에 나가기 위해 목욕재계를 하다 오른쪽 팔 위에 멸망을 의미하는 ‘멸(滅)’이라는 글자가 나타난 것을 보고 병이 나서 10일 후에 죽었다고 한다. 이에 대해 견훤의 군대가 매우 강력하고 잔인하였기 때문에 흥달이 견훤과의 전투에 나가기도 전에 마음에 병이 들어 죽었다고 해석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