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광(林光)은 1088년( 선종 5)에 중국 송(宋)나라 장주(漳州)에서 출생하였으며, 1112년(예종 7)에 상선을 타고 개경으로 와 고려에 귀화하였다. 처음 이름은 임완(林完)이며, 자(字)는 언실(彦實)이다. 1152년(의종 6) 6월 28일에 65세로 사망하였으며, 10월 24일에 정주(貞州) 탄촌산(炭村山) 남쪽 기슭에 장례를 지냈다. 성품이 바르고 곧아 평소 재산을 모으지 않았으며, 경전(經典)과 사서(史書) 보는 것을 일로 삼았다고 한다. 첫 번째 아내는 합문부사(閤門副使) 유문지(劉文志)의 딸로, 2녀 1남을 두었고, 두 번째 아내는 지후(祗候) 서억(徐億)의 딸로, 1녀를 두었다.
고려에 온 2년 뒤인 1114년(예종 9) 과거에서 별사을과(別賜乙科)에 급제하여 감문위녹사(監門衛錄事)에 임명되었다. 1118년(예종 13)에 첨사부주부(詹事府注簿)가 되었다가 얼마 되지 않아 예빈주부 겸 보문각교감(礼賓注簿 兼 寶文閣校勘)이 되었으며, 이어 국자박사(國子博士)가 되었다. 1123년(인종 1)에 우정언(右正言) 지제고(知制誥)로 발탁되었고, 다음 해에 좌정언 지제고(左正言 知制誥)가 되었다.
이자겸(李資謙)이 국정을 농단할 때 인종에게 유신(儒臣)을 불러들여 경전을 강론하라고 거듭 청하였으며, 경천사(敬天寺)와 숭복사(崇福寺)에 대한 공사를 중지하여 민생을 안정시키고 폐단을 없앨 것을 주장하였다.
우정언 석의정(石倚廷)이 외척을 탄핵하다가 귀양 가게 되자, 그 조치가 잘못되었음을 홀로 상소하였다. 그 뒤 우사간(右司諫)이 되었으며, 다시 예부원외 공부낭중 예부낭중 국자사업 직보문각대제(禮部員外 工部郞中 禮部郞中 國子司業 直寶文閣待制)에 임명되었는데, 모두 지제고를 겸하였다.
묘청(妙淸)을 극렬하게 탄핵하였으며, 이에 따라 묘청의난이 진압된 후 1136년(인종 14) 7월에 중서사인(中書舍人)에 임명되었다. 이어 예부시랑 보문각학사(礼部侍郞 寶文閣學士)가 되었다가, 국자좨주 지도성사 국자감대사성 호 · ․예부상서 집현전학사 태자빈객(國子祭酒 知都省事 國子監大司成 戶․禮部尙書 集賢殿學士 太子賓客)에 임명되었다. 1139년(인종 17)에 국자감시(國子監試)를 주관하였으며, 1140년(인종 18)에는 예부시(禮部試)의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어 인재를 선발하였다.
1147년(의종 1)에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가 되었다가 다음 해에 도병마사(都兵馬使)를 거쳐 추밀원사 판비서성사(樞密院使 判秘書省事)에 임명되었다. 1150년(의종 4)에 수사공 좌복야 판비서성사(守司空 左僕射 判秘書省事)가 되었다. 1151년(의종 5)에는 보문각(寶文閣)에 새로 설치된 문첩소(文牒所)의 별감(別監)으로 임명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