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자박사 ()

목차
제도
고려시대 교육을 담당한 관직.
목차
정의
고려시대 교육을 담당한 관직.
내용

설치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989년(성종 8)에 대학조교(大學助敎) 송승연(宋承演)이 사람을 가르침에 게으르지 아니하므로 9등을 뛰어 국자박사를 제수하였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국초부터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뒤 992년에 설치된 국자감(國子監)의 국자학(國子學)에 교수관으로 박사를 두었는데, 처음에는 국자사업박사(國子司業博士)라 칭하였다. 문종 때 사업(司業)을 별도로 분리 설치하면서 국자사업박사를 폐지하고 국자박사를 설치하였다. 정원은 2인, 품계는 정7품이었다.

그 뒤 국자감의 명칭이 바뀌게 됨에 따라 국자박사의 칭호도 여러 차례 개칭되었다. 즉, 1275년(충렬왕 1)에 국학(國學)으로 개칭하였다가 1298년 충선왕에 의해 다시 성균감(成均監)으로 개칭되었는데, 이 때 국자박사를 성균박사로 고쳤다.

다시 1308년에 충선왕이 성균감을 성균관으로 개칭하였고, 1356년(공민왕 5)에는 국자감이라 또 고쳤는데 이 때 다시 국자박사라 하였다. 그러나 그 뒤 1362년에 성균관이라고 다시 개칭하면서 국자박사를 성균박사라 하였다. 이 때 정원은 2인이고, 품계는 7품이었다. 국가로부터 전(田) 60결, 시(柴) 21결을 지급받았다. →성균박사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집필자
노영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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