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동기로회 ()

한문학
단체
고려 중기의 문인 최당(崔讜, 1130∼1211)이 조직한 기로회(耆老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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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고려 중기의 문인 최당(崔讜, 1130∼1211)이 조직한 기로회(耆老會).
개설

최당이 치사(致仕)한 후, 당시의 사대부로서 나이가 많고 덕망이 높은 전·현직(前現職) 고관자(高官者) 8인과 함께 모임을 가졌던 고려시대 최초의 기로회이다.

연원 및 변천

최당이 70세에 문하평장사(門下平章事)에서 물러난 후, 고려 신종(神宗) 6년 74세 때(1203) 당(唐)나라 백거이(白居易, 772∼846)의 향산구로회(香山九老會)와 송(宋)나라 문언박(文彦博, 1006∼1097)의 낙양기영회(洛陽耆英會)를 사모하여, 음주부시(飮酒賦詩)하며 풍류를 즐기고 한적생활(閑適生活)을 하기 위하여 기로들과 함께 자신의 집에서 기로회를 처음 열었다. 모임은 3년 후인 희종(熙宗) 2년(1206)에 최선(崔詵, 1140∼1209)이 가입했을 때 가장 번성하였는데, 이때 참여한 회원과 그들의 나이는 다음과 같다. 장자목(張子牧, 78세), 최당(崔讜, 77세), 이준창(李俊昌, 77세), 백광신(白光臣, 74세), 고영중(高瑩中, 74세), 이세장(李世長, 71세), 현덕수(玄德秀, 71세), 최선(崔詵, 69세), 조통(趙通, 64세) 등 9명이다. 조통을 제외하고는 모두 전직 고관자들로, 그 서열은 벼슬보다도 나이를 우선으로 하였다. 한편 회원 외에 이인로(李仁老, 1152∼1220)가 52세의 나이로 그 말석에 참여하였는데, 그는 기로들의 시문을 모아『쌍명재시집(雙明齋詩集)』을 편찬하고 그 서문(序文)을 짓기도 하였다.

기능과 역할

회원들은 열흘마다 한번씩 모여 오로지 시, 거문고, 술, 바둑으로써 즐길 뿐 세간의 시비득실(是非得失)을 말하지 않기로 약속하고, 문언박의 낙양기영회의 회칙에 따라 회를 운영하였다. 무신정권기의 실권자인 최충헌(崔忠獻, 1149∼1219)이 기로회의 모임에 악사(樂師)를 보내어 흥을 돕도록 하였으며, 당시 사람들은 그들의 소요자적(逍遙自適)는 모습을 보고 지상(地上)의 신선(神仙)이라 불렀다고 한다. 그들은 집회처(최당의 집)를 쌍명재(雙明齋)라 편액(扁額)하고, 화공(畵工)에게 해동기로도(海東耆老圖)를 그리고 돌에 새겨 세상에 전하게 하였다. 쌍명재라는 당호는 최당의 자줏빛 두 눈동자가 모(方)가 나 있는 듯 빛났으므로 장자목이 붙인 것이다. 장자목은 그 편액의 글씨도 썼다. 기로도는 이전(李佺)이 그렸고, 조통이 표지(標誌)를 썼다. 최선이 추가로 회에 참여하자 기로도에 그의 형상을 추가해서 그려 넣고, 또 박인석(朴仁碩)이 표지를 썼다.

의의와 평가

해동기로회가 열린 이후, 그 전통이 이어져 후대 여러 사람들에 의해 각종 기로회가 빈번하게 열렸다. 유자량(庾資諒, 1150∼1229)의 기로회, 금의(琴儀, 1153∼1230)의 기로회, 이진(李瑱, 1244∼1321)의 해동후기로회, 채홍철(蔡洪哲, 1262∼1340)의 기영회(耆英會), 염제신(廉悌臣, 1304∼1382) 등의 원암칠로회(元巖七老會)가 대표적이다. 세상 사람들이 기로회에 대하여 성사(盛事), 지상선(地上仙)이라 흠모한 것으로 미루어 당대 문단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보인다. 후진들이 기로들의 시에 차화운(次和韻)한 점이나 이인로가 『쌍명재시집』을 편찬한 사실에서 그러한 사정을 짐작할 수가 있다. 특히 한문학 발전과 관련하여 기로회에 신진문사(新進文士)를 참여시켜 문재(文才)를 발휘할 수 있게 한 점이 주목된다.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동문선(東文選)』
『목은문고(牧隱文藁)』
『양촌집(陽村集)』
『졸고천백(拙藁千百)』
『파한집(破閑集)』
「고려시대 기로회 연구」(김건곤,『대동한문학』30, 대동한문학회, 2009)
「고려시기 해동기로회의 결성과 활동」(박종진,『역사와 현실』66, 한국역사연구회,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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