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고려 후기에, 추밀원지주사, 좌승선, 참지정사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생애 및 활동사항
그 뒤 풀려나 1204년(신종 7) 추밀원지주사(樞密院知奏事)로서 승도(僧徒) 등이 최충헌(崔忠獻)을 암살하려고 하자 수창궁(壽昌宮)에 들어가 이를 구원하였다. 1206년(희종 2) 좌승선(左承宣)으로 있을 때, 왕이 책명(冊命)을 받기 위해 정숙첨을 금사(金使)에게 보내 행례소(行禮所) 문제를 상의하였다. 1215년(고종 2) 형 정진(鄭稹)과 함께 반역을 도모한다는 예부원외랑 윤세유(尹世儒)의 모함을 받았으나 무고임이 밝혀졌다.
이듬해 거란유종(契丹遺種)의 금산왕자(金山王子)가 무리를 이끌고 침입하자, 참지정사(參知政事)로서 행영중군원수(行營中軍元帥)가 되어 부원수 조충(趙冲)과 함께 염주(鹽州: 황해도 연안) · 배주(白州: 황해도 배천)의 적을 공격하기 위하여 흥의(興義) · 금교역(金郊驛) 사이에 진을 쳤다가 군중(軍中)이 놀라 달아나자 다시 국청사(國淸寺)로 옮겼다.
1217년 최충헌 모살사건에 연루되어 원수직에서 파면되고 하동에 유배되었다. 이는 정숙첨이 군중에서 최충헌이 왕실을 쇠잔하게 하고 적을 불러들였다고 비방한 것에서 빌미가 된 것인데, 이로 인해 최충헌이 죽이려 하였으나 최우가 힘써 구해주었다. 최충헌이 사망한 후 최우가 집권하여 최충헌의 실정을 극복한다는 명분으로 최충헌세력을 제거할 때에도 정숙첨은 살아 남았는데 이 또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밖에 정숙첨은 원수가 된 뒤로 군사들로부터 뇌물을 많이 받아 재산을 축적하여 군사들의 불평이 잦았다. 뒤에 평장사에 올랐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 「최씨집권기 정권의 기반과 정치운영」(오영선, 『역사와 현실』17, 1995)
- 「최충헌정권과 무인」(김당택, 『두계이병도박사구순기념 한국사학논총』, 지식산업사, 1987)
- 「최충헌정권의 성립과 그 성격」(임윤경, 『이대사원』20,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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