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나라의 동부지역에는 북으로 산동반도의 등주(登州) 일대에서 남으로 양자강(揚子江) 하구와 연안지역에 이르는 각지에 많은 신라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통일기 이전에는 신라와 당나라의 교류가 주로 정부 간의 교섭이 중심이었으나, 8세기 이후에는 일반 민간인 차원의 교류가 크게 증진되었다. 이에 국내외적으로 신라인들의 활동 반경이 확대되고 해상 활동 능력이 커져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중국으로 이주하여 갔다.
특히 8세기 후반 이후 신라와 당나라의 중앙권력이 느슨해짐에 따라 신라인들의 해외 활동과 이주는 더욱 증대되었다. 장보고(張保皐) · 정년(鄭年) 등과 같이 보다 넓은 활동 무대를 찾아서 건너간 이들도 보이며, 유학생 · 질자(質子) · 구법승 등의 무리들이 끊이지 않았다. 그리하여 승려 · 학생 · 군인 · 관리 · 농민 · 연안 운송업자 · 수부(水夫) · 공인(工人) · 무역상 등 다양한 면모의 사람들이 당나라 동부 연안을 중심으로 신라인 마을을 형성시켜 나갔던 것이다.
당나라에 거주하던 신라인들의 생활상은 9세기 중엽에 이 지역을 여행한 일본 승려 엔닌[圓仁]의 기행문 『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에 비교적 자세히 전하고 있다. 이에 의하면 양자강 하구지역과 대운하가 연결되는 회하 하류지역에 많은 신라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이 지역을 중심으로 남쪽으로 양주(揚州) · 소우(蘇州) · 명주(明州) 등지에도 신라 상인들이 활약하고 있었다.
신라 상인들은 서쪽으로는 아라비아 · 페르시아 상인과 교역하였고, 동쪽으로는 신라 · 일본에 왕래하며 국제무역의 일익을 담당하였다. 이 지역에서 해주(海州) · 밀주(密州)를 거쳐 산동 등주에 이르는 연안지역에는 각지에 신라인들이 거주하며 신라인 촌락을 형성하고 있었다.
적산촌에 있는 법화원(法華院)은 지역 주민들의 신앙 중심지로서 유명하였다. 또한 적산포(赤山浦)는 신라와 당나라를 이어 주는 중요한 항로의 종착점으로서, 양국 간의 공적인 사신 왕래뿐 아니라 민간무역에 있어서도 주요 중심지였다.
신라인 촌락은 산둥성 남쪽 연안지역 일대에 가장 많이 형성되어 있었다. 이 지역 신라인 사회의 중심 지역은 산동 문등현(文登縣) 일대였다. 문등현청에서 남으로 70여 리 떨어진 청녕향(靑寧鄕)에 구당신라소(勾當新羅所)가 있었다. 여기의 장인 압아(押衙)가 중심이 되어 현 안 각지에 있는 신라인 촌락들을 통괄하며 자치를 영위하였다. 압아의 아래에는 지역이나 호구를 대상으로 한 통제제도인 인보제(隣保制)에 의한 한 보(保)의 장, 또는 촌락의 장으로 여겨지는 촌보(村保)와 판두(板頭)가 있어 각 촌의 신라인들을 통할하였다.
신라소의 자치권은 일정 지역 내에 한하며 근본적으로 당나라 지방관아의 통할 아래 놓여 있었다. 신라소에서 발급하였던 여행허가권을 다시 현청의 공첩(公牒)과 교부하여야 현 밖으로 여행할 수 있었던 것은 그 한 예이다.
그러나 신라인 촌락 내의 거주와 생활은 대체로 신라소의 압아와 촌장의 권한에 속하며 상당한 자치권이 부여되어 있었다. 일본 승려 엔닌이 귀국 명령을 받고도 신라인 촌에 숨어서 이를 피하였고, 신라소에서 보증함으로써 체류가 허가되었던 것은 그러한 일면이다.
신라 멸망 이후 신라소의 운영당과 산동 일대에 신라인 사회는 계속 유지되었고, 본국과도 긴밀히 교류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927년에 등주도독부(登州都督府)에서 등주 지역에 있는 신라인의 행정을 처리하며 장사(長史) 벼슬을 역임했던 신라인 장희암(張希巖), 등주의 지후관(知後官)이며 본국 금주(金州)의 사마(司馬)로서 등주의 거류민과 본국과의 연락관계 업무를 맡았던 것으로 여겨지는 이언모(李彦謨)에 대해 후당(後唐)이 관작을 수여한 사실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 뒤 중국 동해안 신라인 사회의 변모는 1072년에 송나라에 건너간 일본인 구법승려 성심(成尋)의 순례기인 『삼천대오대산기(參天臺五臺山記)』에 단편적으로 보인다. 당시 고려인 · 신라인들은 초주(楚州) 일대 지역에서 운송업에 종사하며 일본 승려의 통역 및 기타 여행에 관한 일들을 주선해 주었다. 일본 승려들은 그들이 신라음악을 연주하고 있었던 따위의 일들을 순례기에 직접 전하고 있다.
신라관(新羅館)과 함께 신라와 당나라의 인적 · 물적 교류가 활발히 전개되었고, 중국의 문물과 제도가 신라의 그것과 어우러졌음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이다. 그 뒤에도 꾸준히 이어져 고려시대에도 한중 두 나라의 문물 교류의 중심으로 자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