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6년에 경주월성과 안압지 사이의 도로에서 출토되어, ‘신라각자석편(新羅刻字石片)’, ‘인수력지명각석편(人首力知銘刻石片)’으로도 불린다. 그러나 발견자가 경주 인왕파출소 앞 도로변 수로에서 수습되었다고 하였는데, 수로 주변은 월성해자 시설이 있었으므로, ‘월성해자비(月城垓字碑)’라고도 부른다. 길이 31㎝, 너비 9㎝ 화강암의 양쪽 면에 2~2.5㎝ 정도의 해서체(楷書體) 글자가 새겨져 있다. 현재 판독 가능한 글자는 아래와 같이 3행 19자 정도이다.
[제1면] 작인거정차급벌차(作人居丁次及伐車) [제2면] 도인수력지나말(徒人首力知奈末) / 차삼인야(此三人也)
‘작인’은 남산신성비(南山新城碑)의 ‘작상인(作上人)’과 같은 것으로 보고, ‘도인’은 명활산성비(明活山城碑)의 ‘추혜하간지도(抽兮下干支徒)’, 남산신성비의 ‘이동성도(伊同城徒)’의 ‘도’와 같은 것으로 추정한다. ‘급벌차’는 신라 경위 9등의 관등인 급벌찬으로 보거나 인명으로 이해하는데, ‘거정차’와 ‘수력지’가 모두 인명이고, ‘수력지’ 뒤에는 신라 경위 11관등인 나말이 붙었으므로, 급벌간(及伐干)으로도 불리는 급벌찬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작인 거정차 급벌차 도인 수력지나말. 이들 3인이다.”로 해석할 수 있다.
발견 장소가 월성 주변이므로, 월성이나 월성해자 등 토목공사를 완료한 뒤 그 사실을 기록한 비석으로 보인다. 월성의 석축 해자는 대체로 6세기 후반~7세기 중반에 축조되었을 것으로 추정하므로, 이 비 역시 이때쯤 제작되었을 듯하다. 삼국시대 신라 중고기 인명과 관등 표기 방식을 살필 수 있는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