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신높이 263㎝, 너비 155㎝, 두께 43㎝. 1962년 국보로 지정되었다. 전체 높이 4.55m에 달하는 거대한 외형에 듬직하고 아름다운 조각수법을 구사하여 신라시대 석비를 대표할 만하다.
귀부의 일부에 손상이 있을 뿐 거의 완전한 상태로, 귀부의 구름무늬나 이수(螭首), 4면의 운룡문(雲龍文)은 생동감이 넘친다. 이수 앞면 중앙에 마련한 제액(題額)은 마멸되어 판독이 어렵다.
비문에는 낭혜화상 무염(無染)의 행적이 모두 5천여자에 달하는 장문으로 적혀 있는데, 찬자(撰者)는 최치원(崔致遠)이며 글씨는 그의 종제 집사시랑(執事侍郎) 인연(仁兗)이 썼다.
비문에는 건립연대가 밝혀져 있지 않은데, 낭혜화상이 입적한 2년 뒤에 부도(浮屠)를 쌓았다는 비문으로 보아 이 때 비문이 작성되고 비가 건립되었다고 추정된다.
한편, 그 밖의 비문내용을 참고하여 효공왕대 초기에 비문이 작성되고 서자(書者)인 최인연이 909년 당나라에서 귀국하여 집사시랑이 된 이후에 비문이 쓰였고 비가 건립되었다는 설도 있다.
최치원이 지은 사산비명(四山碑銘)의 하나로 유명한 이 비문은 신라의 골품과 고어(古語)를 연구하는 자료로서도 귀중하다. 글씨는 자경 2.5㎝의 해서로 최치원의 필의(筆意)를 지닌 구양통(歐陽通)류에 속한다.
짜임새의 어색한 점 등이 최치원의 수준에는 미치지 못하나 필획의 크기에 변화를 주어 행서의 필의를 해서에 가미시킨 점은 독특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