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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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 비각
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 비각
건축
개념
후세에 사적을 전하기 위하여 세운 비(碑)의 보존을 위해 건립한 건물.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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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후세에 사적을 전하기 위하여 세운 비(碑)의 보존을 위해 건립한 건물.
내용

종을 설치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종각이 필요하다. 하지만 를 세우는데 있어 반드시 비각이 필요한 것은 아니었고 다른 목적으로 부가된 것이다.

광개토경평안호태왕비(廣開土境平安好太王碑: 광개토왕릉비)에서 “비석을 세워 훈적을 명기하여 후세에게 보이노라. (중략) 상조선왕 이래로 왕묘에다 석비를 세우지 않았기 때문에 …… 오직 국강상광개토왕이 역대 선왕의 묘에 모두 비석을 세웠다(立碑銘記勳績, 以示後世焉 (중략) 自上祖先王以來, 墓上不安石碑. … … 唯國岡上廣開土境好太王盡爲祖先王墓上立碑銘).”라고 하여 고구려는 광개토왕에 이르러 본인뿐만 아니라 선왕의 업적을 후세에 알리기 위하여 묘비를 세우기 시작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비각을 세운 기록이나 건축에 필요한 초석 등은 발견되지 않아 단순히 비만을 세웠다고 하겠다.

중국 송대 이후 고기물(古器物)의 수집이 시작되었고 이때 고비(古碑)에 대한 사적(史的)인 관심도 함께 높아져 이들의 수집 보존이 새롭게 인식되었다. 이때부터 비의 보존을 위한 비각이 세워지기 시작되었다고 추측된다.

우리나라에서는 당의 영향을 받은 신라의 능묘에 비를 세웠으며, 고려시대에는 탑비를 비롯하여 일반의 신도비(神道碑) 등을 많이 세웠다. 조선시대에는 태조 2년의 환조정릉신도비(桓祖定陵神道碑)를 비롯하여 태종 9년의 태조건원릉신도비(太祖健元陵神道碑) 등이 세워졌으나, 비각을 세우지는 않았다.

이후에는 능비(陵碑)의 제작 또한 없었으나 영조에 이르러 세종영릉표(世宗英陵表) 등 선왕의 능표(陵表)가 일시에 세워졌고 정자각(丁字閣) 등 능묘의 부속 건축물과 함께 비각이 세워지기도 하였다.

이렇게 세워진 비각은 단순한 보존의 기능보다는 능묘의 부속 건축물과 전체적 조화를 이루는 건축형태로 발전하였다. 즉 비각은 비의 보존이라는 일차적 기능에서 비의 본래 목적을 성취시킬 뿐만 아니라, 주변환경과 미적 조화를 이루는 새로운 기능이 더하여졌다고 하겠다.

일반적으로 비각은 정면 1칸, 측면 1칸인 장방형으로 익공식(翼工式)의 공포가 주류를 이루나 때로는 다포식(多包式)이나 민도리집을 쓰기도 한다. 4면의 기둥과 기둥 사이에는 모두 인방 사이에 살대들만을 세워 안이 들여다보이게 한다. 지붕은 네모지붕과 팔작지붕이 주류이고 처마는 겹처마가 일반적이다. 일례로 광화문에 위치한 서울 고종 어극 40년 칭경기념비(서울 高宗 御極 四十年 稱慶記念碑)의 비각에서 이러한 특징을 살펴볼 수 있다.

집필자
김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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