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나라 태정제(泰定帝)의 즉위시 원나라 황후의 명으로 김이(金怡) 등이 원나라에서 가지고 온 불서(佛書)를 고려 충숙왕 14년(1327) 문수사에 보관한 사실과 금전을 시주하여 황태자와 황자의 복을 빌고 황자들의 탄신일에 반승(飯僧)을 시행하고 경전을 열독하게 하라는 사실을 기록하고자 세운 비로, 원의 황실에서 고려 사원에 기복신앙으로 시주하였던 사실을 알려주는 자료다.
비는 일찍이 파손되어 없어졌으나, 다행히도 이제현(李齊賢)의 『익재난고(益齋亂藁)』에 비문내용이 전하며 『대동금석서(大東金石書)』에 비의 전면과 음기 탁본이 일부가 실려 전한다. 또한, 신위(申緯)의 『경수당전고(警修堂全藁)』에는 조선시대 순조 때 신명준(申命準)이 파편 5조각을 발견하였다는 기록이 전한다.
이제현이 비문을 짓고 이군해(李君侅)가 글씨를 썼는데 이들의 관직으로 보아 비문은 대략 1336년(충숙왕 5)에서 1339년(충혜왕 복위년) 이전에 쓰였음을 알 수 있다.
이군해는 당대의 명필로 뒤에 암(嵒)으로 이름을 바꾼 사람이다. 비문의 글씨는 행서로 고려말에 유행하던 원나라 조맹부(趙孟頫)의 서풍과 유사하다. 전액(篆額)은 8㎝ 크기로 중후한 모습이다. 비음(碑陰 : 비신의 뒷면)은 승 성징(性澄)이 조맹부체의 해서로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