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성신문(皇城新聞)』에 따르면, 의정부찬정(議政府贊政) 이윤용(李允用)이 우편물을 포함한 화물과 여객의 수송을 목적으로 자본금 3만원(元)으로 설립하였다고 한다.
이 회사의 설립에 대해서는 다른 설이 있다. 『인천부사(仁川府史)』에 의하면 자본금은 10만원(圓)이었고, 임원으로는 사장대변(社長代辨)에 안영기(安永基), 총무에 정치국(丁致國), 감독에 황최성(黃最性)이 선임되어 회사의 업무를 담당하였다 한다.
창립 뒤 정부 소유 기선인 536t의 창룡호(蒼龍號)와 709의 현익호(顯益號)를 매년 1만 원의 용선료를 납부하기로 하고 정부로부터 세입(貰入)하였다. 창룡호는 외국항로인 인천과 옌타이(烟臺) · 상해(上海) 사이를, 현익호는 국내 연안항로인 인천 · 군산 · 목포 · 제주 · 부산 · 북관 간을 각각 취항시켰다.
같은 해 10월 15만원을 궁내부(宮內府)에 납부하고 창룡호 · 현익호, 그리고 1,027t의 차오저우부호(潮州府號)를 구입하였다. 차오저우부호는 한성호(漢城號)라 이름을 고치고 처음에는 옌타이 · 상해 · 나가사키(長崎) · 고베(神戶) 등 주로 외국 항로에 취항시켰다가 뒤에는 군산 · 목포 · 원산 · 북관 방면에 부정기적으로 취항시켰다.
1901년 5월 97t인 협동호(協同號)를 일본인으로부터 2만 원에 구입해 진남포(鎭南浦) · 만경대(萬景岱) · 군산 · 목포 항로에 취항시켰다. 이 선박은 뒤에 순신호(順新號)라 이름을 고쳐 불렀다. 1902년 7월 일본에 주문해 새로 만든 147t의 일신호(日新號)를 도입해 진남포 · 만경대 항로에 취항시켰다.
소유 선박 중 일신호와 순신호는 소형선에 속하고 객실도 설비되어 있고, 더욱이 화객(貨客)의 운송량이 많은 진남포 · 만경대 · 목포 · 군산 항로를 운항했기 때문에 많은 수익을 거둘 수 있었다. 그러나 1903년 봄 일본인 회사 호리상회(堀商會)가 투기적인 방법을 동원해 경쟁을 걸어오면서 큰 손해를 입고 경영이 부진해지기 시작하였다.
더욱이, 일본 석탄회사로부터 석탄대금 지불 지체를 이유로 선박을 차압당하고, 항해 도중 일본 선박과 충돌사고가 일어나 많은 액수의 배상금을 일방적으로 강요당하기도 하였다.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창룡호와 현익호는 일본군 군수품 수송에, 일신호와 순신호는 일본군 수송에 각각 징발되는 등 계속적인 타격을 받았다.
그 결과 소유 선박을 증가시키지도 못하고 경영의 부진에 빠지고 말았다.
대한협동우선회사는 개항 이후 조선인 자본의 성장이 일본제국주의에 의해 어떻게 방해되고 압살되었나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