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7년 3월 서울특별시 중구 충무로에 있던 동남도서빌딩 3층 사무실에 대우실업이 설립되었다. 자본금 500만 원, 직원 5명으로 출발한 대우실업의 창업주는 김우중(金宇中)이었다. 대우실업주식회사는 창업 전 이미 싱가포르에서 트리코(tricot) 원단의 주문을 받아놓았는데, 자체 생산설비를 보유함으로써 2배의 이익을 추구할 수 있었고, 곧 이어 인도네시아에서 수출주문을 받게 되어 동남아시아에서 제일의 와이셔츠수출업자가 되었다.
그 뒤 대우실업주식회사는 몇 차례에 걸쳐 있었던 섬유제품주기(라이프사이클)의 효율적 활용과 창업주인 김우중이 예견한 섬유시장의 중대한 변화로서 미국에 대한 섬유쿼터에서 안정적 물량을 확보함으로써 1968년 제5회 수출의 날에 산업훈장을 수상하게 되었다. 창업연도인 1967년부터 1970년까지는 제2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에 발맞추어 경공업 위주의 공산품 수출로 수출입국을 목표로 성장하였다.
1971년부터 1975년까지는 제3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에 맞추어 생산구조 고도화, 경제규모 확대를 도모하기 위하여 경공업 국제규모화, 업종 다양화로 금융업에까지 진출하였다. 1976년부터 1979년까지는 흔히 기업확장기로 표현되는데 본격적인 중화학부문·중장비·철도·엔진·조선 등의 공업구조의 고도화를 추구하였다.
그 뒤 1980년부터 1990년대에 이르기까지 중화학 부문에 대한 투자조정, 산업구조 재편성, 성장정책에서 사회개발정책으로 우선순위를 변경하여 안정화를 추구하여, 해외자원개발 참여, 해외건설 및 조선수주, 그리고 대한전선의 가전 분야를 인수하여 전자 분야에 참여하게 되었고, 자동차업계에도 본격적으로 진출하게 되었다.
대우그룹은 주식회사대우가 중심이 된 무역·경공업·건설 분야, 대우중공업주식회사가 중심이 된 일반기계 분야, 대우조선공업이 중심이 된 조선·플랜트 분야, 대우자동차주식회사, 대우전자주식회사가 중심이 된 전자·통신 분야, 동양투자금융주식회사·대우증권주식회사의 금융 분야, 화학·운수·서비스 등에 걸쳐 사업을 펼쳐나갔다.
1998년 당시 국제통화기금(IMF)경제위기를 맞아 대우그룹은 강력한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 그룹구조조정을 단행하였다. 대우는 연말까지 40개인 계열사를 10∼15개로 줄이는 대대적인 구조조정을 하였다. 이를 위해 대우는 구조조정본부의 인원을 보강하고 그 동안 대우자동차에 적을 두고 있던 김태구 사장에게 사실상 본부장 직책을 맡겼다.
대우는 (주)대우, 대우중공업, 대우자동차 등을 ‘주력핵심기업’으로, 대우일렉트로닉스, 대우통신, 대우증권 등을 ‘세계화전초기업’으로 삼아 이들 6개 기업을 중심으로 계열사를 통폐합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대우는 이들 6개 기업과 관련된 1~2개씩 모두 15개 내외만 남겼다. 또한 대우는 대우정보시스템과 대우모터를 합병시키기로 결의했다.
또한 6월 퇴출판정을 받은 4개사 가운데 오리온전기부품, 한국산업전자, 한국자동차연료시스템 등은 합병 등을 통해 정리했고, 동우공영은 종업원 지주회사로 독립시켰다.
대우그룹은 국제통화기금(IMF) 경제위기를 끝내 극복하지 못하고 1999년 부도를 맞아 사실상 해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