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넓은 의미의 수출에는 상품수출뿐만 아니라 용역수출도 포함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좁은 의미의 상품수출을 지칭하고 있다. 상품의 흐름에는 그와 반대방향으로 화폐의 흐름이 있다. 상품수출은 수출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반대급부인 외환의 수취가 중요한 것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금은본위제도(金銀本位制度)하에서는 상품수출이 금 · 은의 반입과 직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수출은 곧 국부(國富)의 증대를 가져오는 것으로 중요시되었다. 금은본위제도로부터 이탈된 후에는 수출이 국내외 수요확대에 의한 생산성 향상 및 수입수요의 재원확보를 위한 외화획득의 원천으로서 중시되고 있다.
교환은 인류의 원시사회로부터 이미 발생하였고, 그것이 공동체와 공동체 사이에 이루어질 때 거기에는 이미 교역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수출과 관련된 대외무역의 등장은 정치형태의 발전과 맥을 같이한다.
기원전 3세기 이전에 편찬된 중국의 ≪관자 管子≫에 의하면, 기원전 7세기에 고조선이 이미 제(齊)나라와 무역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 뒤 삼한에 이르러서는 대외무역이 한층 더 발전하게 되었다.
삼한이 위치하고 있던 지역의 기후가 온화하고 토지가 비옥하여 오곡을 비롯한 각종 농산물이 생산되었으며, 견직물 · 마직물 · 가죽 · 철기 등의 수공업이 발달하였으므로, 이들 상품이 해외의 진귀산물과 교역되었을 것이다. 특히 변진(弁辰)에서는 철이 생산되어 진한 · 마한 · 낙랑군뿐 아니라 일본에까지 수출하였다고 한다. 고구려에서는 472년(장수왕 60)부터 위(魏)나라에 조공(朝貢)을 시작하면서 이전부터 내려오던 사무역과 더불어 공무역이 본격화되었다.
당시 중국에 대한 수출품은 말 · 백은(白銀) · 각궁(角弓) 등 주로 토산물이었으며, 일본에 대해서도 철순(鐵盾) · 철적(鐵的) · 황금 등을 수출하였다. 백제와 신라는 해로(海路)를 통하여 중국 · 일본과의 공무역을 행하였다. 중국과는 토산물을 제공한 대가로 공예품과 특산물을 수입하였으며, 일본과는 무기 · 공예품을 비롯하여 불경 · 역본(曆本) · 약제 등을 수출하고 토산물을 수입하였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잠시 당나라와 국교가 중단되었으나 곧 새로운 차원에서 재개되어 문물교류가 왕성하였다. 이 시기에는 농업발달이 현저하였고 직물과 장신구 등 수공업도 크게 발전하여, 이들 상품유통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특히 해운의 발달은 이들 상품의 활발한 해외무역의 기초가 되었다. 당시의 정치적 사정으로 신라와 발해와의 공무역은 부진하였으나 당이나 일본과의 무역은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통일신라가 당으로 수출한 물품에는 금 · 은 · 동 · 침(針) · 침통(針筒) · 세포(細布) · 미발(美髮) · 면(綿) · 견직물 · 해표피(海豹皮) · 구백전포(狗白氈布) · 장신구 · 인삼 · 우황 · 잣 · 곤포 · 말 등이 있었으며, 대일수출품은 거울 · 침 · 백동화로 · 향 · 인삼 · 병풍 · 면 · 나 · 녹피 · 불상 · 불구 등이었다.
이와 같이 당시의 무역품은 대부분 귀족의 사치품이었으며, 대중의 생활필수품이 아니었다. 특히 수출품에는 고급공예품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
고려는 송나라와 무역을 적극 전개하여 대륙무역을 본격화하였다. 양국간의 국교는 962년(광종 13)에 시작되어 그 뒤 정부간의 공무역과 민간무역이 크게 발달하였다. 공무역은 조공의 형식을 취한 사절무역이었고, 민간무역은 상인간의 호시(互市) 형태를 취하였다. 송나라에 보내는 조공품에는 금 · 은 · 인삼 · 유황 · 나전세공품 · 저마포 · 견직물 · 자수품 · 향유 등이 있었으며, 거란과 여진 및 일본과도 특산물의 교환이 이루어졌다.
조선시대에서는 쇄국주의가 엄격히 수행되었다. 따라서 대외무역은 상당히 소극적이었으며, 표면적으로는 고려시대에 비해 발전된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리고 당시 조선이 국교상 피압박적인, 열등한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명(明) · 청(淸) 등 강대국에 대한 조공무역은 전시대와 다름없이 강행되었다.
명나라와의 교역에 있어서 수출되는 방법은 두 가지로 구분되는데, 하나는 조선측 사절이 명나라에 들어갈 때 우리의 물화를 가지고 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 나라에 온 명나라의 사신이 귀환할 때 가지고 가는 경우이다. 이 경우 수출되는 성격이나 수출물화의 양과 종류는 각기 달랐다.
여러 가지 기록을 통해 볼 때 당시의 수출물화의 종류는 매우 다양하였으며 물량도 많았음을 알 수 있는데, 대강 수출물화를 본다면, 포직류 · 동물 · 지류 · 금은 및 은제품 등 생활필수품 또는 생산재가 대부분이었다. 특히 건국 초기에는 말이 수출품 중 큰 비중을 차지했다고 한다. 조선 후기의 대청무역도 전기의 대명무역과 같이 사절단의 무역으로 시작되었으며, 그 전개양상도 불평등무역관계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다.
대청조공품 및 수출품도 조선이 공물형태로 수납한 농민수공업제품 및 관영수공업제품으로서 그 대부분이 국내의 생활필수품이었기 때문에, 결국 일반국민의 부담은 더욱 가중되었으며, 반면 수입품은 대부분이 사치품이어서 대외무역으로 경제적 실리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당시에는 원칙적으로 사무역이나 잠무역은 인정되지 않았으나, 조선 말기에 이르러서는 국경호시의 사무역이 공무역보다 훨씬 번성하였다.
그리하여 1754년(영조 30) 조선 정부는 마침내 사상인의 물품에 관세를 부과하여 재정수입을 증가시키기로 하고 사무역을 공인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조선의 수출품으로는 소 · 말 · 돼지 · 쌀 · 종이 · 호피 · 해삼 · 모발 · 저포 · 면 · 금 · 명주 등이었는데, 주요 물자의 수출은 막대한 양에 달하였다. 한편, 대일무역도 성행하였는데, 주요수출품은 각종 직물과 대장경 · 인삼 등이었으며, 그 중 면직물이 대종을 이루었다.
대일무역은 원칙적으로 공무역을 중심으로 하였으나 사무역과 밀무역도 상당히 행해지고 있었다. 이 밖에도 조선시대에는 타이 · 자바 · 인도네시아 등의 남만제국과도 교역관계를 맺고 있었으며, 후기에 이르러서는 직접 · 간접으로 서구자본주의제국과도 접촉하게 되었다. 이처럼 전통사회에서의 수출은 국제분업의 이익추구 등을 위한 국민경제적 이해에서 이루어진 것이라기보다는 주로 강대국과 약소국간의 정치적 의례 내지는 인접국간의 상호교린관계 등에 따라 수행된 것이 그 특징이다.
개항으로 시작된 근대적 무역관계는 그 이전과는 성격을 달리하게 되었다. 즉, 국민경제적 이해득실문제에 따라 전개되었다. 1876년의 개항을 계기로 우리 나라가 자본주의의 국제분업체제로 편입되자 대외무역형태도 전형적인 남북무역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즉, 선진공업제국으로부터 근대공업상품이 유입된 반면에, 우리 나라는 그들에게 공업원료 내지 식량 등을 주로 수출하였다. 이 기간 동안 우리 나라의 대외수출은 청 · 일을 중심으로 급속히 증대되었는데, 그만큼 정치적 · 경제적으로도 예속되어갔다. 더욱이 일본으로의 곡물수출 및 금의 반출은 국내식량사정을 악화시키고 국민경제를 위협할 정도였다.
일제의 강점 후 우리 나라에서의 수출은 완전히 일본의 이해관계에 따라서 전개되었다. 수출관세는 소맥 등의 잡곡과 소 · 우피 · 석탄 · 철광 등 8개 품목에 종가 5%를 부과하고 나머지는 무관세로 하였다. 1913년 이후에는 일본국내 식량사정의 악화로 미곡의 이출(移出)이 대폭 증대되었으며, 일본의 공업화 요구에 따라 광산물 · 피혁 · 함금은조동(含金銀粗銅) · 중석 · 원면 · 누에고치 등의 수이출(輸移出)이 크게 확대되었다.
그리고 이때부터 중국시장이 일본과 한국의 중요한 수출시장으로 등장하였다. 1910년부터 1925년까지 15년간 우리 나라의 수출은 10배 가까운 신장세를 나타내고 있는데, 이는 제1차세계대전 후에 세계적인 수요증가와 일본공업력의 급신장, 그리고 당시 일본정부의 수출제일주의의 결과를 반영한 것이었다.
한편 1925년부터 1939년까지 14년간의 수출은 약 3배 정도의 증가에 그쳤는데, 이는 1930년대의 세계공황과 일본의 대륙침공으로 인한 중국의 대일본상품 보이콧운동의 여파에 따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일제하에서 우리 나라의 수출이 급속한 성장을 보인 이면에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은, 1930년대의 수출품 중 일본상품의 비중이 거의 절반을 차지했다는 점이다.
따라서 당시 우리 자력에 의한 수출은 50% 정도에 불과하였다고 볼 수 있다. 상품별 수출구성추이를 보면,식량 · 원료품이 차지하였으며, 완제품과 잡제품의 수출은 일본상품의 대륙에 대한 수출 중계분을 포함하는 것으로 풀이된다.
수출의 정체 광복과 국토분단, 그리고 6 · 25전쟁이라는 우리 나라 경제 · 산업 · 무역에 대단한 장애요인이 있었던 이 시기는 수출이 완전히 정체된 기간이었다. 즉, 우리 나라 산업과 일본산업과의 계열관계 단절, 구원화권(舊圓貨圈) 상품시장의 손실, 남북한 산업의존관계의 단절 등으로 우리 수출산업은 전멸상태였다.
1946년의 수출은 350만 달러에 불과하였고, 1947년과 1948년에는 전통적인 농산물 수출이 2000만 달러대를 각각 기록하였다. 1949년에는 세계적인 경기후퇴로 수출은 1000만 달러대로 후퇴하였으며 6 · 25전쟁으로 인하여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1953년에는 중석 등 전략적 중요 광물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여 수출이 3900만 달러를 기록하기도 하였으나, 1950년대를 통틀어 수출은 2000만 달러 내외에서 정체하였다.
수출주도형 경제개발계획이 추진된 1962년 이후 우리 나라의 수출은 1960년대의 10년간에는 25배, 그리고 1970년대의 10년간에는 21배의 초고속 신장세를 나타냈고, 1980년대에는 2.1배, 그리고 최근 6년간에는 2배의 신장을 보였다.
1947년을 기준으로 누적배율을 보면 1960년까지 1.3배로 저조하던 우리 나라의 수출은 1970년에 32배, 1980년에는 673배, 1990년에는 2,500배, 그리고 1996년에는 4,989배에 달한다. 만일 이것을 1946년(350만 달러)을 기준으로 보면 1985년은 무려 8,652배가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수출의 증가는 해외시장지향적 공업생산의 확대에 크게 기여하였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국민총생산의 성장에 선도적 구실을 하였다.
그러는 동안 우리 나라 수출이 세계 수출총액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966년에 0.14%에 불과하였으나 1979년에는 0.99%에 달하였다. 이는 세계인구의 0.8% 정도에 해당하는 우리 국민 1인당 수출이 세계평균 수준을 넘어서게 된 것을 의미한다. 1996년에는 2.5%를 나타냈다.
우리 나라가 경제개발계획을 처음 시작한 1962년의 경우 공산품을 제외한 1차 산품의 수출비중은 무려 73%를 차지하였으나, 그 뒤 수출규모의 확대와 더불어 1차 산품의 비중은 매년 감소하여 1996년에는 6.5%로 크게 떨어진 반면에, 공산품수출비중은 1965년부터 1차 산품을 압도하기 시작해 1996년에는 총수출의 93.5%에 달하였는데, 이는 수출의 양적인 신장과 함께 수출산업고도화에 힘입은 결과였다.
또한 이와 같은 공산품수출의 급격한 신장은 제2차 경제개발계획이 끝나는 1971년까지만 해도 섬유 · 합판 · 신발류 등 노동집약적 경공업제품이 주류를 이루었으나, 중화학공업에 역점을 둔 제3차 경제개발기간(1972∼1977) 중에는 자본 및 기술집약적인 비금속광물제품 · 철강제품 · 기계류 및 화학제품 등의 수출비중이 크게 증가하였으며, 4차부터 7차까지의 5개년계획 기간을 거치면서 중화학제품이 주도적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특히 그 중에서도 기술집약적이고 부가가치가 높은 전기전자 · 자동차 · 일반기계, 선박 그리고 철강이 호조를 보이고 있으나 일부 품목에 대한 미국 유럽공동체(EC) 등에서의 덤핑시비로 그 지속성여부가 불투명하며, 또한 환경문제 특히 프레온가스 배출품목에 대한 무역규제 등도 수출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한편, 수출시장의 구조가 미국과 일본으로 편중돼 여러 가지 문제를 나타내자 정부는 시장다변화정책을 강력히 추진하였는데, 그 결과 편중도가 크게 둔화되기는 하였지만 오늘날 개도국에 대한 수출이 호조를 보이고 있으나, 그것은 대체로 경공업제품 및 가전제품의 수출과 또 한편으로는 국내의 고임금을 탈피하기 위한 저임금국으로의 생산기자재의 이전에 수반되는 것으로 장기적으로 우리 나라의 수출을 저해할 가능성이 우려된다.
또한 우루과이라운드(Uruguay Round) · 세계무역기구(WTO) 그리고 RIO환경회의에 대처하는 것이 선진국들에 뒤져 결과적으로 주요 선진국에 대한 수출 신장세가 둔화된 한 요인이었던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또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국이 된 우리 나라로서 대외경제협력을 증진하여야 할텐데 작금의 경상수지적자 상태에서 무작정 대외차입으로 대외원조 내지 차관의 공여증대에는 한계가 있다.
그에 따라 우리 나라도 원화의 유무상원조를 공여함으로써 연계차관(tied loan)과 같은 수출증진효과를 신중히 검토해볼 만 하다. 실제로 일본이 제2차대전 후 동남아 제국에 배상을 할 때 태국을 비롯해 여러 나라에 엔차관을 공여함으로써 동남아제국의 시장을 석권하기 시작했음은 타산지석이 될 것이다.
수출주도형 경제개발정책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내수시장이 협소하고 부존자원이 부족한 우리 나라와 같은 경우, 경제산업을 발전시키기 위해 외수(外需)를 목표로 수출진흥정책을 수행한다는 것이다. 이는 무역을 통해서 외화획득을 꾀하는 데 그치지 않고 무역을 통하여 경제성장을 추진하는 데 그 전략적 의의가 있다.
한 나라의 수출이 증진되기 위해서는 상품이 국제경쟁력을 갖추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수출지향적인 정책체계의 뒷받침이 절대로 필요하다. 즉, 수출산업의 기반을 조성하기 위하여 세제 · 금융 · 관세 · 외환 · 내국세부문에서의 지원제도를 활용하는 동시에 공업단지나 수출자유지역 등의 설치, 수출시장의 개척 등을 단계적으로 추진하여야 한다.
한편, 수송 · 통신 · 도로 · 항만 · 에너지 등의 사회간접자본을 확충하고, 경제구조에서 파생되는 불안정화 요인 또는 무역이익의 결실을 제약하는 인플레이션과 환율의 과대평가, 그리고 생산조직의 비신축성 등을 정책적으로 해결해야 한다. 우리 나라에서는 현재 매년 수출진흥회의를 통해 수출촉진을 위한 기본목표를 설정하고, 외교통상부주관하에 각종 수출지원정책이 수행되고 있다.
현행 우리 나라의 수출진흥정책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금융 부문의 지원으로서 우리 나라 수출진흥정책 중 가장 큰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다른 무엇보다도 만성적인 초과자금수요하에서 적기에 필요한 자금을 국제금리수준으로 지원함으로써, 내수산업에 비해 풍부한 자금공급과 더불어 저금리의 혜택을 부여하는 수출산업진흥정책이다. 우리 나라 수출금융제도의 특징은 금리면의 우대, 양적인 면의 우대, 수혜자격의 제한, 수출이행의무 및 사후관리 등을 들 수 있다.
둘째, 조세 부문의 지원으로 금융지원과 더불어 조세가 갖는 유인효과를 통해 수출산업의 국제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정책이다. 정부는 관세 부문과 내국세 부문으로 나누어 조세지원정책을 수행하고 있다. 먼저 관세 부문에서는 통관절차를 간소화하기 위해서 보세구역설정, 지정관세제도 및 화주직접신고제도의 운영, 통관수수료의 차등적용 등이 시행되고 있으며, 관세부담을 경감 내지 환급하기 위해서 관세의 분할납부 · 징수유예 등의 통관제도를 운용하고 있다.
다음으로 내국세 부문에서는 <조세감면규제법>과 <부가가치세법>을 통하여 수출업체의 각종 직접 · 간접세에 감면 및 인하혜택을 주고 있다.
셋째, 외환관리면에서의 수출지원정책이다. 여기에는 내국신용장제도 · 보증신용장제도 · 상사외화보유제도를 비롯하여 상업목적의 해외여행경비, 해외지사의 설치비 및 유지비의 인정 등을 포함하고 있다. 이것은 외국환의 보유 및 운용과 외화여신제도(外貨與信制度)의 운용에 대한 지원으로 나누어진다.
넷째, 금융 · 조세 · 외환 부문 이외에도 수출진흥을 위해 상역정책(商易政策)상 많은 지원정책이 수행된다. 그 대표적인 것으로는 수출보험제도, 수출실적별 우대조치, 종합무역상사에 대한 지원정책, 원자재우선수입권 및 원자재수입금융특혜, 해외지사설치의 지원제도, 수출물품구매업신고제도, 수출조합제도 등이 있다.
우리 나라에서는 이와 같은 각종 수출지원정책을 통하여, 경제개발 초기에는 1차 상품 및 노동집약적 상품수출, 그리고 해외원자재 가공수출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으며, 오늘날에는 산업구조를 중화학구조로 고도화시켜 수출산업구조를 강화시켜 나갔다.
앞으로 WTO 체제하에서는 각종수출 진흥정책의 시행에는 제동이 걸리기 쉽고, 또한 경저해 상품의 개선 및 신상품 개발을 적극 지원하는 방향으로 정책의 역점을 옮겨야 할 것이다.
1986년 이후 1988년까지 우리 나라는 1977년에 소폭 흑자를 낸 것을 제외하고는 사상 처음으로 경상수지 46억 2000만 달러부터 89억 달러까지의 대폭적인 흑자를 기록하였다. 이러한 성과는 원유가 및 국제금리하락과 엔화강세 등 이른바 3저현상에 힘입은 바 컸지만 기본적으로는 우리 나라의 산업경쟁력이 크게 향상된 결과라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
앞으로 이와 같은 국제수지 흑자기조가 지속되기 위해서는 과거 적자 밑에서 누적되었던 문제점을 개선해나감은 물론 최근의 대외통상마찰 및 통화증가 등의 문제점들을 효과적으로 해소해나가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과제이다. 우선, 선진국과의 통상마찰은 우리 나라의 지역별 무역불균형이 현저히 개선되지 않는 한 어렵게 되기 때문에, 수입선다변화와 신시장개척노력을 해야 한다.
또한 이제까지의, 물량위주의 소나기식 수출을 지양하고 수출의 내실화를 기해야 하는 것도 시급한 과제이다. 한편, 수출과 내수의 상호보완적인 균형성장을 할 수 있도록 통화관리를 강화하고, 산업구조고도화를 위해 균형있는 투자확대를 추진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산업구조조정정책에는 기업의 지나친 해외투자가 자칫 국내의 산업공동화로 고용문제와 더불어 수출저해에 대한 신중한 분석과 대책이 긴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