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죽산(竹山). 자는 성재(聖哉). 출신은 분명하지 않으나 서자였다.
개화에 눈을 떠 일본을 왕래하다가 1887년(고종 24)에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의 주사로 발탁되어 최초의 주일공사 민영준(閔泳駿)의 통역관이 되었다. 그러나 민영준의 돌연한 사임으로 3개월 만에 귀국하여 별군직(別軍職) · 장위영영관(壯衛營領官) · 전환국방판(典圜局幇辦) 등을 지냈다. 이 시기에 일본의 문물을 수용하면서 화약 생산을 위한 제약소(製藥所) 설립과 신식 화폐 발행에 주력하였다.
1894년 동학농민군의 봉기를 계기로 청일전쟁이 발발하자 핵심적인 친일개화파관료로 등장하였다. 제1차 김홍집(金弘集)내각에서는 우포도대장 겸 군국기무처회의원(右捕盜大將兼軍國機務處會議員)을, 제2차 김홍집내각에서는 탁지부협판(度支部協辦)을 지내면서 갑오개혁을 추진하였다.
1895년 4월의 삼국간섭 이후 일본을 배격하고 러시아 세력을 끌어들이려는 명성황후의 신임을 받아 경무사(警務使)와 군부대신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군부대신직에서 해임되었다. 그 후 친미 · 친러파가 을미사변에 대한 반동으로 일으킨 춘생문사건(春生門事件)에 가담했다가 실패하자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1896년 2월 국왕의 아관파천으로 특지사면되었고 경무사와 중추원 일등의관직에 임명되었다. 독립협회의 창립에 참여해 초대회장직을 맡기도 하였다. 정부의 식산흥업정책에 따라 설립된 대조선저마제사회사(大朝鮮苧麻製絲會社)의 사장을 지냈다. 1898년 7월 경무사를 지낸 김재풍(金在豊) · 이충구(李忠求) 등과 더불어 추진하던 황제양위음모가 발각되자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그 뒤 망명정객 박영효(朴泳孝) 일파와 합세하여 독립협회와의 제휴를 통한 정계 복귀를 기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주한일본공사 하야시[林權助]의 주선으로 1900년 1월에 귀국하여 공정한 재판을 받는다는 조건으로 자수하였다. 그러나 심한 고문을 받은 뒤 이준용(李埈鎔) 옹립사건을 고하지 않은 죄 및 황제양위 미수사건(1898)에 관련된 죄로 교수형에 처해졌다.
1907년에 신원되었으며, 시호는 의민(毅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