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용 옹립사건 ( )

근대사
사건
흥선대원군의 적손(嫡孫) 이준용을 국왕으로 옹립하려다 실패한 사건.
정의
흥선대원군의 적손(嫡孫) 이준용을 국왕으로 옹립하려다 실패한 사건.
역사적 배경

이재면(李載冕)의 아들 준용을 그의 숙부 고종 대신 조선왕조의 왕으로 추대하고 대원군으로 하여금 섭정하려는 음모는 1886년(고종 23) 주차조선총리교섭통상사의(駐箚朝鮮總理交涉通商事宜) 위안스카이(袁世凱)에 의해 처음 시도되었다.

위안스카이는 친러·친미정책을 쓰고 있던 고종과 민씨척족정권을 견제하기 위해 친청보수의 대원군이 집권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하고 청국의 군사력을 동원, 고종을 폐위시키고 나이 어린 이준용을 왕위에 앉히려고 하였다.

그러나 음모는 청국 북양대신 이홍장(李鴻章)의 협조거부와 다른 여러 가지 이유로 실패하였다.

경과와 결과

이준용을 국왕으로 모시려는 두번째 음모는 1894년 7월 23일 일본군의 지원으로 대원군이 집권한 다음 대원군과 그의 추종자에 의해 시도되었다.

대원군은 이준용을 옹립하기 위한 준비 조처로 7월 26일부터 8월 15일 사이에 27세의 이준용을 내무아문협판(內務衙門協辦 : 내무대신직 서리)과 통위사(統衛使) 등 정부 요직에 임명하고, 이준용의 당여(黨與)인 이태용(李泰容)·박준양(朴準陽) 등을 군국기무처 회의원으로 발탁, 임명하여 그를 돕도록 하였다.

그러나 국왕 및 왕비를 추종하는 일부 근왕파 개혁관료들의 반발과 일본공사관의 반대로 실패하였다. 음모가 발각된 뒤, 고종과 민비는 12월 새로 바뀐 내각 내무대신 박영효(朴泳孝)와 법무대신 서광범(徐光範)으로 하여금 이준용과 그의 당여를 처벌하도록 하였다.

이준용은 1895년 4월 19일 체포되어 특별재판소에서, 5월 13일김학우(金鶴羽) 암살사건과 연루되어 종신유형 판결을 받았으며, 그의 당여 중 박준양·이태용 등을 포함한 5명은 교수형에 처하여졌다. 선고 당일 이준용은 왕명으로 10년유형으로 감형을 받고 교동부(喬桐府)에 유배되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대원군은 민비에 대해 더욱 큰 원한을 품게 되었다. 이 사건 후 이준용은 ‘3년간 일본유학’이라는 명목으로 출국하였다가 1907년 7월순종이 즉위한 다음에야 귀국이 허락되었다.

참고문헌

『고종실록(高宗實錄)』
『한국사(韓國史)』-최근세편(最近世篇)-(진단학회, 을유문화사, 1961)
관련 미디어 (1)
집필자
유영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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