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조선의 제26대 왕, 고종의 조카로, 육군 참장, 신궁봉경회 총재 등을 역임한 종실·관료·친일반민족행위자.
개설
생애 및 활동사항
1890년 10월부터 승정원 동부승지를 거쳐 형조 참의·성균관 대사성·홍문관 부제학·규장각 직제학·도승지·이조 참의 등을 역임하였다. 1894년 다시 권력의 전면에 나서게 된 대원군이 친일정권을 등에 업고 한때 그를 국왕으로 추대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갑오개혁 기간 중, 내무아문 협판 겸 친군 통위사(親軍統衛使)·내무대신 서리에 임명되었으나 군국기무처의 반발로 내무아문 협판직을 사임하였다. 대원군의 후원으로 밀사를 지방으로 파견, 지방 유생과 동학농민군을 추동하고, 평양에 주둔한 청나라 군대와 내통하여 일본군을 몰아내고 친일정권을 전복하려고 기도하였다. 그러나 이 계획이 발각되고, 새로 부임한 일본공사 이노우에[井上馨]의 압력으로 대원군이 정계에서 은퇴하자 1895년 주차(駐箚) 일본 특명전권공사로 내정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같은 해 3월 군국기무처 의원 김학우(金鶴羽) 암살사건에 연루되었고, 또 박영효(朴泳孝)·서광범(徐光範) 등 친일파 내각 대신을 암살하려 하였다는 죄목으로 특별재판소에서 사형판결을 받았다. 이후 국왕의 특사로 교동부(喬桐府) 10년 유배형으로 감형되었고, 그 해 8월 특사로 석방되어 12월 일본에 유학하였다. 1897년 8월 일본 정부의 주선으로 영국을 비롯한 유럽 각지를 시찰하였고, 1899년 1월 다시 일본으로 돌아와 지바현[千葉縣]에 머물렀다. 1900년 6월 안경수 쿠데타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령이 내려져 한국 정부가 그의 인도를 요구하였으나 일본이 거부하였다. 1902년 11월 김형섭과 김의선이 그를 암살하려다 실패하였다.
1907년 6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통감에게 수차례 전보를 보내어 귀국 허가와 사면 추진을 요청하여 7월 14일 망명생활을 끝내고 부산으로 귀국하였다. 같은 해 9월 영선군(永宣君)에 봉해졌고, 11월 육군 참장(參將)에 임명되었다. 1908년 9월 의양군(義陽君) 이재각(李載覺)이 총재로 있던 상공근무사(商工勤務社)의 총고문이 되었다. 1909년 8월 신궁봉경회(神宮奉敬會) 총재가 되었다. 이 단체는 단군(檀君)과 일본의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神]의 위패를 봉안하는 신궁을 건립하여 일본과 한국을 각각 주종관계로 하는 ‘일선동조(日鮮同祖)론’을 구현하려던 단체였다. 이준용은 『신궁건축지(神宮建築誌)』에 상량문(上樑文)을 직접 작성하면서 일본 시조신인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神]를 단군과 함께 한일의 공동 선조로 묘사하였고, 1910년 6월 『신궁건축지』를 발간하여 배포하였다.
같은 해 8월 대한제국의 대훈금척대수장(大勳金尺大綬章)을 받았다. 1911년 1월 13일 16만 8천원의 은사공채를 받았고, 1912년 8월 1일 한국병합기념장을 받았다. 1912년 9월 20일 이재면의 공위를 계승하고 같은 날 ‘칙허를 경유하여’ 이준(李埈)으로 개명하였다. 이로써 이준공으로 불리며, ‘전하’의 경칭을 받았다. 1917년 3월 22일 사망하였고, 5월 의친왕 이강의 차남 이우가 양자로 결정되어 그의 공위를 세습하였다.
참고문헌
- 『친일인명사전』(민족문제연구소, 2009)
-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Ⅳ-14(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현대문화사, 2009)
- 「일제강점 전후 한국 황실 친인척의 행적과 일제의 우대」(최재성, 『한국민족운동사연구』 52, 한국민족운동사학회,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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