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용 ()

법제·행정
인물
조선의 제26대 왕, 고종의 조카로, 육군 참장, 신궁봉경회 총재 등을 역임한 종실 · 관료 · 친일반민족행위자.
이칭
이칭
경극(景極), 석정(石庭), 송정(松亭), 영선군, 이준(李埈)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70년(고종 7) 6월 25일
사망 연도
1917년 3월 22일
본관
전주(全州)
출생지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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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의 제26대 왕, 고종의 조카로, 육군 참장, 신궁봉경회 총재 등을 역임한 종실 · 관료 · 친일반민족행위자.
개설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경극(景極), 호는 석정(石庭)·송정(松亭)이다. 아버지는 이재면(李載冕)이고, 어머니는 풍산 홍씨이다. 흥선대원군의 적손(嫡孫)이자, 고종의 조카이다. 부친 사후 부친의 공위(公位)를 세습하면서 이준(李埈)으로 개명하고, 이준공으로 불리게 되었다.

생애 및 활동사항

1870년 6월 25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1884년 갑신정변 때 세마(洗馬)가 되었고, 1885년 동몽 교관(童蒙敎官)에 임명되었다. 1886년 문과에 급제하여 규장각 대교(待敎)가 되었고, 이어 홍문관 정자·예문관 검열에 임명되었다. 1886년 청나라의 주차조선총리교섭통상사의(駐箚朝鮮總理交涉通商事宜) 위안스카이[袁世凱]가 대원군과 협력하여 고종을 폐위시키고 이준용을 국왕으로 세우려고 하였으나 북양대신 이홍장(李鴻章)이 제지하였다. 1887년 12월 어머니 상을 당하여 3년간 복상(服喪)하였다.

1890년 10월부터 승정원 동부승지를 거쳐 형조 참의·성균관 대사성·홍문관 부제학·규장각 직제학·도승지·이조 참의 등을 역임하였다. 1894년 다시 권력의 전면에 나서게 된 대원군이 친일정권을 등에 업고 한때 그를 국왕으로 추대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갑오개혁 기간 중, 내무아문 협판 겸 친군 통위사(親軍統衛使)·내무대신 서리에 임명되었으나 군국기무처의 반발로 내무아문 협판직을 사임하였다. 대원군의 후원으로 밀사를 지방으로 파견, 지방 유생과 동학농민군을 추동하고, 평양에 주둔한 청나라 군대와 내통하여 일본군을 몰아내고 친일정권을 전복하려고 기도하였다. 그러나 이 계획이 발각되고, 새로 부임한 일본공사 이노우에[井上馨]의 압력으로 대원군이 정계에서 은퇴하자 1895년 주차(駐箚) 일본 특명전권공사로 내정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같은 해 3월 군국기무처 의원 김학우(金鶴羽) 암살사건에 연루되었고, 또 박영효(朴泳孝)·서광범(徐光範) 등 친일파 내각 대신을 암살하려 하였다는 죄목으로 특별재판소에서 사형판결을 받았다. 이후 국왕의 특사로 교동부(喬桐府) 10년 유배형으로 감형되었고, 그 해 8월 특사로 석방되어 12월 일본에 유학하였다. 1897년 8월 일본 정부의 주선으로 영국을 비롯한 유럽 각지를 시찰하였고, 1899년 1월 다시 일본으로 돌아와 지바현[千葉縣]에 머물렀다. 1900년 6월 안경수 쿠데타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령이 내려져 한국 정부가 그의 인도를 요구하였으나 일본이 거부하였다. 1902년 11월 김형섭과 김의선이 그를 암살하려다 실패하였다.

1907년 6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통감에게 수차례 전보를 보내어 귀국 허가와 사면 추진을 요청하여 7월 14일 망명생활을 끝내고 부산으로 귀국하였다. 같은 해 9월 영선군(永宣君)에 봉해졌고, 11월 육군 참장(參將)에 임명되었다. 1908년 9월 의양군(義陽君) 이재각(李載覺)이 총재로 있던 상공근무사(商工勤務社)의 총고문이 되었다. 1909년 8월 신궁봉경회(神宮奉敬會) 총재가 되었다. 이 단체는 단군(檀君)과 일본의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神]의 위패를 봉안하는 신궁을 건립하여 일본과 한국을 각각 주종관계로 하는 ‘일선동조(日鮮同祖)론’을 구현하려던 단체였다. 이준용은 『신궁건축지(神宮建築誌)』에 상량문(上樑文)을 직접 작성하면서 일본 시조신인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神]를 단군과 함께 한일의 공동 선조로 묘사하였고, 1910년 6월 『신궁건축지』를 발간하여 배포하였다.

같은 해 8월 대한제국의 대훈금척대수장(大勳金尺大綬章)을 받았다. 1911년 1월 13일 16만 8천원의 은사공채를 받았고, 1912년 8월 1일 한국병합기념장을 받았다. 1912년 9월 20일 이재면의 공위를 계승하고 같은 날 ‘칙허를 경유하여’ 이준(李埈)으로 개명하였다. 이로써 이준공으로 불리며, ‘전하’의 경칭을 받았다. 1917년 3월 22일 사망하였고, 5월 의친왕 이강의 차남 이우가 양자로 결정되어 그의 공위를 세습하였다.

참고문헌

『친일인명사전』(민족문제연구소, 2009)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Ⅳ-14(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현대문화사, 2009)
「일제강점 전후 한국 황실 친인척의 행적과 일제의 우대」(최재성, 『한국민족운동사연구』 52, 한국민족운동사학회,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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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최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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