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래의 안정을 원하는 자본주의적 생산관계가 유럽 여러 나라에 성립됨에 따라 17세기에 국제거래 안정을 위한 통상관계를 규율하는 규정을 포함한 조약들이 등장하였으나, 독립된 형태의 조약체결은 18세기 이후의 일이다.
우리 나라에서 통상조약이 명문으로 체결된 것은 1876년(고종 13) 일본과의 강화도조약 이후였다. 그 전에는 외국과의 통상관계가 주로 사신내왕 때 이루어지는 공무역관계가 중심이었고, 민간인의 외국과의 통상거래는 국가의 폐쇄정책으로 불허되었기에 명문화된 통상에 관한 협정은 거의 없었다.
다만, 외국과의 분쟁 결과 그에 대한 협정서를 체결하면서 체결서 내용 중 일부에 외국인의 국내활동 허용, 항구개방, 특정상품의 수출·수입 허용 등 통상에 관한 내용이 삽입되어 있었을 뿐이었다.
통상조약이라는 명칭은 1876년 문호개방 직후, 외국과의 무역에 관한 조약체결 때 주로 사용된 것이었고, 국제간에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모든 분야의 교역이 일상화된 현대에는 통상이란 개념에 한정하지 않고 일반조약·협정·협정서·의정서 등 다양한 명칭으로 사용되고 있다.
19세기 중엽에 선진 자본주의국가들은 독점자본주의의 자기 모순을 극복하기 위하여 해외시장 진출을 꾀하였는데, 1832년 영국의 교역신청으로부터 시작하여 프랑스·러시아 등 여러 국가의 통상요구가 있었으나 우리 나라에서 거절하여 실패로 돌아갔다.
이와 같은 서구 여러 나라의 통상요구에 자극받은 일본은 우리 나라 정부에 수교를 요구하였으나 실패로 돌아가자, 1875년 운요호사건(雲揚號事件)을 일으켰다.
다음해인 1876년 무력으로 위압하여 강화도에서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를 체결하였다. 이 조약은 항구의 개항과 무역의 불간섭, 수출입 면세 조항 허가 등 일방적인 불평등조약이었다.
이 조약으로 말미암아 부산항 개항을 비롯하여 1880년 원산항, 1883년 인천항을 개항하게 되고, 일본 상품은 관세 없이 우리 나라 시장에 물밀듯이 들어오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 조약에 뒤 이어서 외국과의 통상조약이 계속해서 체결되었는데, 1882년 5월 중국 이홍장(李鴻章)의 알선으로 미국과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였다.
① 8·15광복 이전:이어 9월에 청나라와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朝淸商民水陸貿易章程)이 체결되었는데, 이로써 청나라의 국내침략을 합리화했으며, 주재공사가 내정을 간섭하고 추천받은 독일인이 조선해관(朝鮮海關)의 지배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그리고 일본은 1883년 7월에 조일수호조규속약(朝日修好條規續約)을 체결하여 국내의 행상권(行商權)과 경성진출의 권리를 획득하였다. 영국과 독일도 1883년 11월 각각 조영수호통상조약·조독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였는데, 양국은 서로간의 처음부터 국내 내륙지방에서의 상행위를 인정하였던 것이다.
이 후 우리 정부는 서양 여러 나라와 적극적으로 통상조약을 체결하였는데, 1884년 6월 이탈리아와 조이조약(朝伊條約)이 조인되고, 1886년 7월 비준 교환되었으며, 1884년 7월에 러시아와 조로조약(朝露條約)이 조인되고 1885년 10월 비준 교환되었다. 프랑스와도 1886년 통상조약이 조인되는 등 서양 여러 나라와 통상관계를 맺게 되었다.
이와 같이, 우리 나라는 1882년부터 서양 여러 나라와 통상조약을 맺게 되자 비로소 폐쇄체제에서 벗어나 세계의 일원으로서 국제무대에 진출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국경을 통과하는 수출입상품에 대하여 관세를 부과할 수 있는 권리를 되찾게 되었다.
당시 구미 여러 나라는 자국의 산업보호를 위하여 적자보호관세율을 높이는 반면, 자국 생산품의 수출을 증대하기 위하여 후진국에 대하여는 불평등한 일방적 저율관세를 강요하였다. 청나라나 일본은 물론 우리 나라도 구미 여러 나라와 통상관계를 맺으면서 예외일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조미수호통상조약에서도 관세율은 저율로 규정되었고, 미국에게 일방적 최혜국(最惠國) 대우를 부여할 것을 규정하였다. 그러나 각 세율에 관하여는 우리 정부가 3개월 전에 통고함으로써 임의로 변경할 수 있다는 관세 자주권을 인정받게 되었다.
조미수호통상조약에 이어 영국 및 독일과 맺은 수호통상조약에서도 대체로 동일한 약정이 행해졌다. 이에 따라 과거 7년간 우리 나라를 마치 통용관세 제도하에 있는 식민지와 같이 취급하여 수출입품에 대한 무관세를 강요, 실시하여 왔던 일본도 불평등한 통상조약을 수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고, 마침내 1883년에는 우리 나라의 관세 자주권을 인정한 조일통상장정(朝日通商章程)과 해관세칙(海關稅則)을 약정하기에 이르렀다.
이와 같이 1880년대에는 1882년의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을 계기로 일방적이고 저율이기는 하나 수출입상품에 대하여 관세를 부과할 수 있는 권리를 인정한 통상조약을 각국과 체결하게 되었다.
이로써 우리 나라 무역에서 일본의 독점을 배제하였을 뿐만 아니라, 우리 나라에 대한 종주권을 고집하고 있던 청나라와도 1882년에 체결된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 등에서 근대적 통상관계를 규정하는 한편, 관세에 관한 규정을 두게 되었고, 1899년에 맺은 조청통상조약을 통하여 근대적 무역관계의 확립을 보게 되었다.
그리하여 1882년 이후 우리 나라는 각국과 근대적 무역관계를 맺기 시작했으며, 비로소 각국의 상권 확장 경쟁시대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각국과 자유통상이 시작된 이후에도 크게 실리를 얻을 수 있었던 나라는 청나라와 일본이었다.
이는 우리 나라와 인접국이라는 입지조건에도 그 원인이 있기는 하였으나, 청나라와의 오랜 역사적 관계와 지리적 조건, 그리고 청나라 상인들이 인천을 중심으로 하는 상권을 선취하고 있었으며, 일본 상인의 대한 진출을 적극 지원한 일본 정부의 시책 등에 기인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1882년 우리 나라가 미국과 통상조약을 체결하여 국제사회의 일원으로서 세계 무대에 진출한 이래, 일본에 강점당해 식민지가 된 1910년에 이르기까지 독립국으로서 명맥을 유지하고 각국과 자유로이 교역할 수 있는 소지를 마련하였지만, 그러한 발전적 노력은 일제의 강점에 따라 완전히 수포로 돌아갔던 것이다. 일제강점 기간 동안에는 외교권이 없었기 때문에 특별한 통상조약이 체결되지 못하였다.
② 8·15광복 이후:1945년 광복 이후, 새로운 현대적인 통상관계를 맺었는데, 형식은 통상조약에 한정하지 않고 국제법상의 조약으로 다자간(多者間) 또는 양자간 조약·협약·협정·규약·선언 등의 명칭으로 체결 또는 가입하여 우리 나라와 외국 간의 자주적이고 평등한 통상관계가 확대되었다.
1960년 이후, 경제개발5개년계획 실천과 발맞추어 미국·일본·유럽지역 외에 중동지역과의 통상관계가 수립되었을 뿐만 아니라 동구권과의 통상도 이루어져, 1971년에는 통상관계를 수립한 교역국 수가 108개 나라, 1989년 12월에는 198개 나라로 확대되었다.
이어 1991년에는 구소련과, 1992년에는 중국과 통상관계를 수립함으로써 이름 그대로 세계화 시대에 걸맞는 통상관계시대를 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