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소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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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개념
한 나라의 국민이 일정 기간 동안 새로이 생산한 재화와 서비스의 가치를 시장가격으로 평가하여 합산한 총소득.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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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한 나라의 국민이 일정 기간 동안 새로이 생산한 재화와 서비스의 가치를 시장가격으로 평가하여 합산한 총소득.
내용

흔히 ‘국민총생산(Gross National Product:GNP)’이라는 용어로 불린다. 따라서 국민소득 통계는 한 나라의 경제수준과 국민의 생활수준을 종합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대표적인 경제지표라 할 수 있다.

국민소득은 보는 각도에 따라 생산·분배·지출의 세 가지 측면에서 파악할 수 있는데 이들은 국민소득이라는 동일한 대상을 각각의 관점에서 다르게 보는 데 불과하므로 사후적으로는 서로 일치하게 마련이다.

먼저 생산국민소득은 생산주체인 기업이 노동·자본·토지·경영 등의 생산요소를 투입하여 생산활동을 수행한 결과 새로이 창출된 생산물의 가치를 합산함으로써 파악할 수 있다. 그리고 분배국민소득은 생산활동에 참여한 생산요소의 제공자에게 임금·이자·임료·이윤의 형태로 돌아가게 되는 소득을 모두 합하여 산출하게 된다.

또 분배된 소득은 개인이 물건을 구입(소비)하거나 기업이 공장을 짓고 기계를 구입(투자)하는 데 지출함으로써 최종생산물에 대한 수요로 나타나게 되는데 이를 지출국민소득이라 한다.

국민소득은 생산의 범위와 평가방법 등에 따라 여러 가지 개념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 국내총생산과 국민총생산으로 나누어진다. 국내에 거주하는 모든 생산자가 생산한 부가가치, 즉 판매수입에서 원재료비를 공제한 새로이 창출된 가치의 총계를 국내총생산(Gross Domestic Product:GDP)이라고 한다.

국내총생산에서 해외의 생산요소 제공자에게 지급한 소득(대외지급 요소소득)을 차감하고 반대로 우리 나라 국민이 외국에 생산요소를 제공한 대가로 받은 소득(대외수취 요소소득)을 더하면 국민총생산(GNP)이 된다.

둘째, 고정자본소모(固定資本消耗)의 포함 여부에 따라 총생산과 순생산으로 구분한다. 국민총생산(GNP)은 총부가가치 개념으로서 여기에는 생산과정에서 마모된 기계·건물 등 고정자본에 대한 충당분(고정자본소모)이 포함되어 있다.

고정자본소모는 순수하게 새로 생산해 낸 부가가치가 아니므로 총부가가치에서 이를 제외할 필요가 있는데 국민총생산에서 고정자본소모를 차감한 개념이 국민순생산(Net National Product:NNP)이다.

셋째, 국민소득을 분배면에서 본 지표로는 협의의 국민소득·개인소득·개인가처분소득 등이 있다. 국민순생산(NNP)은 시장가격으로 평가한 개념으로 부가가치세·특별소비세와 같은 세금이 포함되고 정부가 기업에 생산을 장려하기 위하여 지원하는 보조금이 제외되어 있다. 국민순생산에서 세금을 제외하고 보조금을 더하면 요소비용으로 평가한 협의의 국민소득(National Income:NI)이 된다.

그리고 이 국민소득(NI)에서 개인에게 분배되지 않는 법인유보, 법인세 등을 공제하고 정부의 사회보장비와 해외로부터의 송금과 같이 개인에게 지급되는 이전소득을 더하면 개인소득(Personal Income:PI)이 된다.

또한 개인소득(PI)에서 개인이 부담하는 소득세와 해외송금 등의 이전지급을 차감한 것이 개인이 실제로 받고 또 임의로 처분할 수 있는 개인가처분소득(Personal Disposable Income:PDI)이다.

넷째, 적용되는 가격에 따라 경상국민소득(經常國民所得)과 불변국민소득(不變國民所得)으로 분류해 볼 수 있다. 경상가격은 당해시점의 가격을 말하며 불변가격은 특정기준시점(기준년)의 가격을 의미한다.

국민경제의 구조나 국민소득 구성요소의 변동 등을 분석하는 경우에는 경상국민소득 계열을 사용하게 되며 국민경제의 장기적인 변동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불변국민소득 계열이 이용된다. 따라서 경제규모나 1인당 국민소득 등은 경상국민소득으로 표시하며 경제의 발전속도, 즉 성장률은 불변국민소득을 이용하여 산출한다.

우리 나라의 국민소득 통계는 1957년 한국은행이 공식편제기관으로 지정되면서 체계적인 편제가 시작되었다. 이전에도 개략적이나마 국민소득이 작성된 적이 있었는데 광복 전에는 일본인들에 의하여 우리 나라 국민소득이 몇 차례 추정·발표된 적이 있었다.

광복 후 초기에는 경제정책입안 기초자료의 필요성 때문에 당시의 기획처 경제기획국, 재무부 사세국(司稅局) 및 조선은행 조사부에서 생산·분배 및 지출국민소득을 각각 분담하여 추계한 적이 있었다.

또한 전후 복구사업을 지원하기 위하여 설치된 UN의 경제조정관실에서도 독자적으로 추계하기도 하였으나 이들 각 기관의 추계결과는 상호간에 큰 차이를 보이고 연관성도 없어 이용자들에게 혼란을 야기시켰다.

그 뒤 1957년 8월 홀(Hall,J.K.) 박사를 단장으로 하여 내한했던 재무부 사세문제단은 “한국의 국민총생산에에 대한 건의”에서 각 기관의 연관성 없는 추계를 지양하고 한국은행으로 하여금 국민소득추계를 전담하게 할 것을 건의하였다. 이 건의가 채택됨으로써 한국은행은 우리 나라 국민소득 통계의 공식편제기관으로 지정되었다.

이를 계기로 한국은행에서는 국민소득통계 전반에 관한 조사 연구와 추계업무의 정비 및 통계의 정확도 제고를 위한 노력을 기울였으며 1958년부터는 UN에서 권고하는 방식(A System of National Accounts:1953 SNA)에 따라 1953년 이후의 국민소득계열을 작성, 발표하였다.

그리고 1968년 UN은 국민경제활동을 종합적이고 체계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새로운 “국민계정체계(國民計定體系, 1968 SNA)”를 발표하고 각국에 이 체계에 의한 통계편제를 권고함에 따라 우리 나라도 1986년에 국민소득통계를 UN의 새로운 체계로 개편·완료하고 이를 발전시켜 현재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1970년대 후반 이후 경제의 서비스화, 금융혁신, 지구환경문제의 부각 등 경제환경이 크게 변화함에 따라 UN에서는 이를 적절히 반영할 수 있도록 1993년에 재개정된 국민계정체계(1993 SNA)를 발표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한국은행에서도 1993 SNA의 도입을 위하여 실무작업준비를 하고 있으며 새로운 기준에 의한 국민소득통계작성을 단계적으로 이행하여 2004년 이후에는 완전한 이행을 목표로 하고 있다.

(1) 경제재건기(1954∼1961)

광복 이후 1953년 휴전이 성립되기까지 우리 나라 경제는 정치·사회적 혼란과 경제질서의 불안정 등으로 격심한 인플레이션의 소용돌이 속에서 정체를 면하지 못하였다.

특히 6·25전쟁은 30억 달러 이상으로 추정되는 막대한 전쟁피해와 심한 사회적 혼란을 야기하였으며 전쟁중에는 잇따른 흉작으로 농업생산이 크게 줄고 경제가 큰 폭의 마이너스 성장을 보이는 등 국민경제가 크게 위축되었다.

그러나 1953년 휴전 이후 우리 경제는 전쟁복구와 외국원조, 농업생산의 증대 등에 힘입어 점차 회복되는 기미를 보이기 시작하였다.

경제재건기로 볼 수 있는 1954∼1961년 동안의 경제성장 추이를 보면 1957년 이전에는 주로 외국원조의 증가와 농업생산의 호조에 힘입어 농업이 흉작이었던 1956년을 제외하고는 연평균 5% 정도의 비교적 높은 성장률을 나타내었다.

그러나 1958년부터는 전후의 악성인플레이션의 수습을 위한 안정화 정책이 강력히 추진된 데다 외국의 원조도 점진적으로 감소하면서 국내생산활동이 위축되어 경제성장률도 다소 둔화되기 시작하였다.

이에 따라 1954년∼1961년중 우리 경제는 연평균 4.0% 성장하여 1961년에는 국민총생산규모(경상가격기준)가 1953년보다 6.1배 늘어난 2,942억 원(21억달러)에 달하였다.

이 기간 중의 경제성장은 우리 경제 내부의 자생적인 동력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소비재 중심의 외국원조와 같은 외부적 요인에 크게 의존한 것이어서 자립경제의 기반을 구축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2) 자립기반구축기(1962∼1971)

우리 경제의 1960년대는 1950년대의 외국원조에 의존한 전후복구사업에서 벗어나 자주경제의 기반을 구축하여 지속적인 고도성장의 기틀을 마련한 한국경제사에 있어서 획기적인 전환기였다.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우리 나라는 대내적으로는 4·19혁명과 5·16군사정변 등 일련의 정치·사회적인 대변혁을 겪었으며 대외적으로는 미국의 원조가 축소되는 등 불리한 여건 아래서도 체계적인 장기경제개발계획을 수립하고 1962년부터 시행함으로써 우리 경제의 자립기반을 마련하게 되었다.

우리 나라의 비좁은 국내시장과 자본부족을 보완하기 위하여 수출주도형 공업화전략을 채택한 제1·2차 경제개발5개년계획(1962∼1971)이 성공적으로 추진된 데다 세계경제도 호황을 보인 데 힘입어 우리 경제는 양적 및 질적으로 현저한 발전을 이룩하였다.

먼저 경제성장면에서 보면 투자확대와 수출증대를 바탕으로 1962∼1971년중 연평균 8.6%의 고도성장을 달성하여 경제규모가 3조4191억 원(95억달러)으로 11배 이상 늘어났으며 1인당 국민총생산도 1961년의 82달러에서 1971년에는 289달러로 크게 높아졌다.

산업별로는 이 기간중 제조업과 사회간접자본 부문이 각각 연평균 18.3% 및 18.2%의 높은 성장을 보여 경제성장을 주도하였으며 농림어업은 연평균 3.5%의 성장에 그쳤다. 이에 따라 산업구조에서는 제조업비중이 1961년의 14.4%에서 1971년의 21.1%로 높아졌으며 공업구조에서도 중화학공업의 비율이 1961년 28.6%에서 1971년에는 40.4%로 높아졌다.

이러한 고도성장을 뒷받침하여 이 기간 중 투자가 크게 늘어나 국내총투자율은 1961년의 12.0%에서 1971년에는 24.8%로 2배 이상 높아졌다. 투자재원의 조달측면을 보면 국내저축동원의 확대에 힘입어 총저축률이 1961년의 11.7%에서 1971년에는 16.1%로 높아졌으나 국내저축에 의한 투자재원조달의 비중은 오히려 떨어졌다.

(3) 산업구조의 고도화기(1972∼1978)

1970년대에 들어서도 우리 나라는 중화학공업의 육성을 목표로 한 경제개발계획을 계속 추진하여 지속적인 고도성장과 산업구조의 고도화를 이룩하였다. 그러나 이 기간 중 세계경제질서가 본질적인 변혁을 보이는 가운데 두 차례에 걸친 석유파동으로 대외여건이 악화되면서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을 겪었다.

1970년대에 들어 나타나기 시작한 주요 선진국의 경기침체와 보호무역주의의 강화 등으로 대외여건이 크게 악화되면서 그 동안 호황을 누리던 우리 경제는 1971년∼1972년중 불황국면에 접어 들었으나 정부의 8·3조치와 때를 맞춘 세계경기의 상승에 힘입어 1973년 중 일시적으로 호황을 누렸다.

그러나 1973년 10월 발생한 1차 석유파동으로 세계경기가 후퇴함에 따라 우리 나라는 수출증가세의 둔화, 물가의 급등, 생산 및 투자의 위축 등 심각한 어려움에 직면하게 되어 1974∼1975년 중 성장률이 크게 둔화되었다.

이에 따라 정부는 환율평가절하와 수출지원금융의 강화 등 다각적인 대응책을 강구하여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한 결과 1976년∼1978년 동안 연평균 10% 이상의 고도성장을 지속하였다.

우리 경제는 1972년∼1978년 동안 연평균 8.9%에 이르는 높은 성장을 이룩함으로써 1인당 국민총생산이 1977년에 1천 달러를 넘어섰으며 1978년에는 1,400달러로 늘어났다.

이 같은 고도성장의 원동력인 수출도 1971년의 10억 달러에서 크게 늘어나 1977년에 1백억 달러를 돌파함으로써 제4차 경제개발계획의 정책목표인 1백억 달러 수출과 1천 달러 소득을 조기에 달성하였다.

또한 중화학공업의 집중적인 육성과 공산품의 수출증대에 힘입어 전체산업에서 제조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1971년 21.1%에서 1978년에는 26.7%로 높아졌으며 제조업 중에서 중화학공업이 차지하는 비중도 같은 기간중 40.4%에서 53.0%로 크게 상승하였다.

(4) 구조적 전환기(1979∼1989)

우리 경제는 1970년대에 급변하는 국내외 경제환경 속에서도 급속한 발전을 이룩하여 대표적인 신흥공업국의 하나로 탈바꿈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 동안 양적인 팽창에 치우친 고도성장과정에서 누적된 구조적인 문제점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여 경제의 어려움을 가중시켰다.

1977년 이후 통화팽창과 1978년의 경기과열 등으로 초과수요현상이 나타난 데다 국제원자재 가격의 앙등과 1976∼1978년중 평균 30% 이상에 달하는 높은 임금상승으로 인플레이션 압력이 가중되었으며 기업의 차입에 의한 무리한 시설확장으로 기업의 재무구조와 대외경쟁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이처럼 경제의 안정기반이 위협받고 지속적인 성장을 저해할 우려가 있는 구조적인 문제점들이 속속 드러나게 되자 정부는 1979년 4월 경제안정종합시책을 발표하고 이를 강력히 추진하게 되었다.

즉, 재정금융면에서 긴축정책을 펴 나가면서 그 동안의 집중적인 투자확대로 통화팽창과 기업체질약화의 큰 요인이 되어 온 중화학공업 부문의 과잉·중복투자를 과감히 조정하고 목표달성 위주의 과도한 수출드라이브정책을 억제하는 등 내외수요부문간의 불균형을 줄이는 동시에 경제의 안정기반을 튼튼히 다지는 경제정책으로 일대 전환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안정화정책의 효과가 경제 전반에 파급되는 가운데 대폭적인 원유가격 인상이라는 제2차 석유파동의 충격이 닥치면서 1979년 하반기부터 국내경기는 급속하게 후퇴하였다.

그 결과 1979년 중 경제성장률은 6.8%로 떨어졌으며 1980년에는 그 영향이 본격적으로 파급된 데다 일기불순에 따른 농산물흉작과 10·26사태로 인한 사회불안 등 여러 가지 요인이 겹쳐 -3.9%의 성장을 보여 경제개발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이후 처음으로 마이너스성장을 기록하였다.

그러나 1981년에는 쌀을 비롯한 농산물의 생산회복과 수출증대에 힘입어 5.5%의 성장을 나타냄으로써 경제가 점차 회복세를 보였다.

그런데 1981년 4/4분기부터 다시 수출이 현저히 둔화되면서 경기회복세가 일시적으로 주춤하자 정부가 1982년 상반기 중 주택활성화조치 등 다각적인 경기회복책을 강구함에 따라 주택건설을 중심으로 경기가 회복세를 되찾음으로써 1982년에는 7.5%의 건실한 경제성장을 유지하였다.

1983년에 들어서는 세계경기 회복과 더불어 물가안정, 임금상승둔화, 저금리 등으로 대외경쟁력이 제고되어 12.2%의 높은 성장률을 보였으며 이러한 안정기조정책은 1984년에도 계속 강화되었다.

그러나 1985년에는 세계경제가 조정국면에 접어들면서 선진국들의 수입규제 강화로 수출이 극히 부진하고 소비와 투자도 저조하여 제조업은 6.2%의 성장에 그쳤으며 전체 경제성장률도 6.6%의 낮은 성장에 머물렀다.

이러한 실물경제의 움직임에 대응하여 정부는 1985년 2/4분기부터 경제의 안정기조를 유지하는 범위 내에서 경기부양정책을 시행하게 되었다.

1986∼1989년 중 우리 경제는 그 간의 경제안정화정책과 기업의 품질향상 및 신기술개발노력으로 산업의 국제경쟁력이 현저히 강화된 가운데 대외여건에서도 저유가·저금리·달러약세의 3저시대를 맞이하여 유례없는 호황을 누렸다.

이 기간 중에는 수출이 크게 늘어나 만성적인 적자를 보여 왔던 경상수지가 흑자로 전환되고 물가도 안정되면서 경제성장률은 1989년을 제외하고는 10% 이상을 기록하였다.

1986년에는 3저현상에 힘입어 경제가 급상승세로 반전하면서 수출이 크게 증가하였고 이에 따라 제조업이 19.5%의 높은 신장세를 보여 전체 경제성장률이 11.9%에 이르렀으며 경상수지가 당시로서는 사상 최고인 47억달러 흑자를 기록하였다.

또한 총저축률이 1985년의 29.8%에서 1986년에는 33.7%로 크게 높아져 국내총투자율 29.8%를 처음으로 상회함으로써 자립경제의 기틀을 마련하게 되었다.

1987년에는 수출증가와 투자확대 등에 힘입어 국내경기가 활기를 지속하는 가운데 12.3%의 높은 성장과 1인당 GNP 3,218달러를 기록하고 경상수지흑자도 101억 달러로 흑자폭이 전년보다 크게 확대되었다.

이와 같은 경상수지흑자폭의 확대로 가중되는 통화증발 압력에 대처하기 위하여 국제수지흑자관리대책을 수립, 시행하였으며 아울러 국내시장의 대외개방도 본격적으로 추진하게 되었다.

한편, 6·29선언을 계기로 사회 전반에 확산된 자유화분위기에 편승하여 노사분규와 불법쟁의행위가 전국적으로 빈발하여 그 발생건수가 과거 10년간 일어난 총건수의 2배 수준에 달하였다.

이는 그 간의 고도성장과정에서 근로자들이 상대적으로 성장과실분배에서 소외되어 왔다는 잠재의식이 정치·사회적 전환기에 일시적으로 분출된 결과이다.

1988년에도 우리 경제는 원화절상, 노사분규 그리고 선진국의 보호무역주의 강화 등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12.0%의 고도성장을 이룩하고 경상수지가 145억 달러로 더욱 확대되는 등 파죽의 호조세를 지속하였다.

그러나 1989년 들어서면서 우리 경제는 그 동안의 노사분규와 급속한 임금상승 그리고 원화절상 등으로 다시 어려운 고비를 맞이하게 되었다. 경제성장률이 1986∼1988년 중 평균성장률의 절반수준인 6.9%로 급격히 둔화되었다.

그리고, 그 동안 경제성장의 견인차였던 제조업 부문의 성장도 전년의 13.8%에서 4.2%로 크게 떨어졌으며 경상수지 흑자폭도 54억 달러로 대폭 축소되었다. 또한 주택 등 부동산가격이 폭등하여 물가불안을 야기하기도 하였다.

(5) 개방화·국제화기(1990∼1997)

우리 경제는 1990년대에 들어 시대적 조류인 개방화·국제화 추세에 대처하여 경제의 체질과 구조를 개선하기 위한 경제개혁을 지속적으로 추진하였다.

1980년대 후반에 지속된 고도성장으로 야기된 극심한 노사분규와 급속한 임금상승, 기술개발 및 구조조정의 부진 등으로 대외경쟁력이 저하되면서 1989년에 성장이 크게 둔화되었던 우리 경제는 1990년에는 다소 회복되어 9.6%의 성장을 나타내었으며 제조업 성장률도 9.7%로 높아졌다.

그러나 수출이 해외시장 여건의 악화로 소폭 증가에 그치고 수입은 크게 증가함으로써 경상수지가 전년의 54억달러 흑자에서 20억달러 적자로 반전되었다.

1991년에 들어서는 전년에 이어 내수 주도의 성장세가 지속되고 경상수지적자가 대폭 확대되는 등 대내외 불균형이 심화되었다. 1992∼1993년중에는 정부의 다각적인 정책적 노력에도 불구하고 5% 수준의 낮은 성장세를 보였으나 경상수지는 크게 개선되어 1992년중 39억 달러 적자, 1993년에는 10억 달러 흑자를 기록하였다.

1994∼1995년 중에는 1993년 중 일시적으로 보인 국제수지 흑자에 자신감을 얻어 국제화·개방화와 관련된 각종 규제완화와 자유화조치들이 계속 이어졌다. 이러한 여건 변화 속에서 우리 경제는 1994년 중 선진국 경기회복 등에 힘입어 8.4%의 성장세를 보여 본격적인 경기확장 국면에 진입하게 되었다.

그러나 대외거래면에서는 높은 수출증가에도 불구하고 자본재수입 등 수입이 보다 큰 폭으로 늘어남에 따라 경상수지는 39억 달러 적자를 보여 전년의 10억 달러 흑자에서 적자로 다시 반전되었다. 1995년에 들어서도 전년의 높은 성장세가 이어져 8.7% 성장하였으나 경상수지는 적자폭이 전년보다 대폭 확대된 85억 달러를 기록하였다.

1996년에 들어와 우리 경제는 활력이 크게 줄어드는 모습을 보이게 되는데 성장률이 전년보다 크게 떨어진 6.9%에 그친 데다 국제수지면에서도 수출증가세가 반도체가격 폭락 등으로 둔화된 반면, 수입은 소비재 수입, 해외여행 경비지급 등이 급증하여 높은 증가세를 유지함에 따라 경상수지 적자규모가 사상 최대인 230억 달러를 기록하기에 이르렀다.

1997년 중에는 연초 이래 계속된 대기업의 부도로 금융·외환시장의 불안이 이어지는 가운데 금융기관의 부실채권 누증, 동남아 국가의 외환위기 등의 영향으로 외환사정이 급격히 악화되면서 연말에 이르러서는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긴급자금을 차입할 수밖에 없는 최악의 외환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연중에는 전년에 이어 경기 하강국면이 지속된 데다 연말경에 발생한 외환위기의 충격이 겹쳐 성장률이 전년의 6.9%에서 4.9%로 둔화되고 물가오름세가 확대되었다. 그러나 경상수지는 내수가 급속히 위축됨에 따라 적자규모가 전년의 230억 달러에서 86억 달러로 축소되었다.

한편, 외환위기를 맞아 정부는 외환시장 안정을 위해 주식 및 채권시장의 대외개방을 확대하고 외환관련 규제를 대폭 완화하는 한편, 환율변동폭의 제한을 폐지하였다. 이와 함께 IMF의 자금지원이 결정된 12월 초 이후에는 IMF와의 합의에 따라 경제안정화 및 구조개혁에 역점을 둔 조치가 강력하게 추진되었다.

IMF 체제하의 우리 경제는 당분간 큰 어려움을 겪을 것으로 보인다. 국내수요의 대폭적인 위축으로 경기가 크게 침체되면서 마이너스성장을 기록하고 기업부도 증가 등으로 실업이 급증할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 물가는 외환위기에 따른 환율급등의 영향으로 크게 상승할 것으로 우려된다.

한편, 국제수지는 대외여건의 악화에 따른 수출부진에도 불구하고 내수침체로 수입감소의 폭이 커지면서 흑자기조로 돌아서게 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우리 경제가 당면한 최대의 과제는 현재의 외환위기를 빨리 극복하고 건실한 성장기반을 확보하는 데 있다.

이를 위해서는 수출증대를 통하여 가용외환보유액을 지속적으로 늘려나가는 외에 외환위기의 근본원인인 기업 및 금융부문의 구조적 취약성을 철저히 치유해 나가는 것이 필요하다.

특히, 기업의 취약한 재무구조를 개선하고 기업경영의 투명성을 높이는 동시에 금융기관의 부실채권을 조기에 정리하고 회생이 어려운 부실금융기관을 시장에서 퇴출시키는 강도 높은 조치가 필요하다.

아울러 기업퇴출이나 노동시장의 수급이 시장기능에 의해 큰 마찰없이 이루어지고 조절될 수 있도록 하는 등 경제를 운영하는 모든 분야에서 선진국의 규범이 통용될 수 있도록 여건을 조성하는 제도정비와 관행정립이 시급히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한편, 우리 경제가 외환위기에 봉착하게 된 원인 중의 하나로 1990년대 들어 세계화 및 정보화의 급속한 진전, 그리고 국제금융자본의 자유로운 이동 등 세계금융시장의 통합화에 따른 국제경제 및 금융환경변화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한 점을 들 수 있다.

따라서 우리 경제가 현재의 위기상황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세계경제 및 금융의 흐름을 정확히 인식하고 이에 능동적으로 대처해 나가는 것이 필요하다고 하겠다.

참고문헌

『한국의 국민소득』(한국은행, 1965·1982·1983·1985·1986)
『금융경제기초』Ⅰ(한국금융연구원, 1998)
『국민계정해설』(한국은행, 1991)
『알기쉬운 경제지표 해설』(한국은행, 1995)
『연차보고서』(한국은행, 1990∼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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