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사시찰단은 1881년(고종 18) 4월 10일부터 윤7월 2일까지 약 4개월에 걸쳐 일본에 파견되었던 문물시찰단이다. 당시 강국으로 발돋움하고 있던 일본의 국정과 문물을 탐방하기 위해 12명의 전문위원을 비롯해 12반 총 60명으로 구성되었다. 모두 암행어사의 자격을 유지하며 비밀리에 개별적으로 행동하였다. 비용은 전적으로 조선 정부가 부담하고 일본에도 출발 이후 통보하는 등 자주성 유지에 노력했다. 전문위원들은 분야를 나누어 각기 국정 시찰을 하고 자세한 보고서를 제출하였다. 조사시찰단의 활동은 성공리에 이루어졌고 국내 개화세력의 증대에도 기여하였다.
1873년 흥선대원군의 10여 년에 걸친 집정이 끝나고, 고종이 직접 통치를 하게 되면서 등장한 민씨척족정권(閔氏戚族政權)은 제한된 의미에서지만, 정책방향을 개화로 돌려 1876년 일본과 강화도조약을 체결하였다. 그리고 그 해 김기수(金綺秀)를 제1차 수신사로 일본에 파견하였으며, 김홍집(金弘集)을 제2차 수신사로 파견하였다. 이때 김홍집이 가져온 황준헌(黃遵憲)의 『조선책략(朝鮮策略)』은 조야에 큰 관심을 일으켰으며, 1880년에서 1881년에 이르는 초기 개화운동의 시발이 되었다.
이에 정부는 종래 시무(時務)라는 말로 요약된 선진문물의 수입대상을 종전의 청나라에서 일본으로 바꾸고, 구체적인 대책을 마련하였다. 1880년 12월 근대적인 문물제도를 수용하기 위한 기구로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이 설치된 것은 그러한 맥락에서 이뤄진 것이다. 그리고 1881년에는 영선사(領選使)를 청나라에 파견한 것은, 북학사상의 맥을 이어 이기(利器)의 수입을 도모한 조처였다. 이에 비하여 일본에 조사시찰단을 파견한 것은 국제적인 세력균형을 배려해 강국으로 발돋움하고 있던 일본의 국정 내지 문물에 대한 관심의 표현이었다. 일본은 1868년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을 이룩하고, 서양의 새로운 문화를 적극 도입하면서 일대 개혁을 추진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므로 일본에 문호를 개방한 조선으로서는 우선 일본의 정세를 파악하고, 나아가 그를 통하여 세계정세를 관측하면서 개화라는 당면과제 해결을 모색할 필요가 있었다.
개항 후 일본은 시찰단의 파견을 적극 권장했지만, 조선정부 단독으로 계획이 이뤄지면서 은밀하게 추진되었다. 시찰단의 일원으로 뽑힌 조사(朝士)들에게는 모두 동래부암행어사라는 직함이 부여되어, 본인들조차 자신들의 임무를 정확히 모르고 개별적으로 서울을 떠났다. 1881년 1월부터 2월초에 걸쳐 출발한 일행이 각자 암행어사의 형색으로 부산을 향해 연도의 민정을 살피는 어사의 고유업무를 행하면서 부산에 집결한 것은 3월 하순경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암행어사로 발령 받은 것은 비밀을 보장하는 한편, 행로의 편의를 제공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당시 국내는 김홍집이 가지고 온 『조선책략』에 대한 여론이 분분하고 신사위정척사론이 비등해지며, 이만손(李晩孫)을 소두(疏頭)로 한 영남만인소(嶺南萬人疏)가 올려지는 등, 전국 각지에서 개화정책을 비판하는 유생들의 운동이 전개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이 서울을 출발한 뒤에야 비로소 김홍집과 일본공사 하나부사[花房義質] 사이의 교섭이 진행되고, 개화승 이동인(李東仁)이 참모관으로서 구체적인 주선을 하였다. 그런데 특기할 사실은 이들 조사시찰단의 파견비용을 조선정부가 전적으로 부담했다는 점이다.
시찰단의 구성을 보면 전문위원인 12명의 조사와 각 조사 밑에 수행원인 수원(隨員) 2명, 통역관인 통사(通士) 1명, 하인 1명으로 한 반을 5명으로 편성하여 12반으로 짜여 모두 60여 명이었다. 조사는 조준영(趙準永) · 박정양(朴定陽) · 엄세영(嚴世永) · 강문형(姜文馨) · 조병직(趙秉稷) · 민종묵(閔種默) · 이헌영(李憲永) · 심상학(沈相學) · 홍영식(洪英植) · 어윤중(魚允中) · 이원회(李元會) · 김용원(金鏞元) 등으로서 30∼40대의 청장년급 중견 인물들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각기 분담된 전문분야가 있어서, 박정양은 내무성 및 농상무성, 민종묵은 외무성, 어윤중은 대장성, 조준영은 문부성, 엄세영은 사법성, 강문형은 공부성, 홍영식은 육군, 이헌영은 세관 등을 책임지고, 각기 담당 분야에 대해 시찰을 하고 자세한 보고서를 작성하도록 하였다.
4월 10일 일본상선 안네이마루[安寧丸]를 타고 부산을 출발, 대마도에 도착해 다시 나가사키[長崎] · 아카마세키[赤間關] · 오사카[大阪] · 고베[神戶] · 요코하마[橫濱] · 에도[江戶]를 거쳐 4월 28일 동경에 도착하였다. 일행은 사행(私行)으로 자처하여 공해(公廨: 관아)에 들기를 거절하고 민가에 나누어 거처를 정하였다. 그들은 74일간 동경에 체재하면서 요코하마 · 대판 등지를 출장하면서 맡은 바 임무대로 보고서를 작성하였다. 일본의 조야는 이들에 대해 환대일색이었고, 이들의 시찰기간 중 안내를 위해, 조선주재 일본공사 하나부사가 6월초 일시 본국으로 귀국해 그들과 동행하였다. 이외에도 외무성 대서기관인 미야모토[宮本小一]와 원로원 서기관인 모리야마[森山茂]가 접대의 임무를 담당하였다. 이들이 일본에서 만난 인물들 중에는 분담관청의 장관이나 기관장 이외에 산조[三條實美, 태정대신] · 다루히토친왕[熾仁親王, 좌대신] · 이와쿠라[岩倉具視, 우대신] · 이토[伊藤博文] 등 일본 정계의 거물들이 망라되었고, 또 그들은 일본주재 청국공사 하여장(何如璋), 부사 장사계(張斯桂), 참찬관 황준헌 등과도 접촉하였다.
이들은 두 달 반에 걸친 조사 일정을 마치고, 7월 11일 일본 외무성이 마련한 전별연(餞別宴)에 참석한 뒤, 7월 14일부터 몇 반으로 나누어 귀로에 올랐다. 7월 24일 청나라로 간 어윤중 · 김용원의 두 반을 제외한 10개 반이 고베에 집결한 뒤, 7월 28일 상선 센사이마루[千歲丸]로 그 곳을 출발하여 윤 7월 3일 동래에 도착하였다. 4개월에 걸친 그들의 일본시찰임무는 일단 완수된 것이다. 서울 출발 때와 마찬가지로 시찰단은 다시 동래부암행어사의 자격으로 개별적으로 역로(驛路)의 민정을 살피면서 8월말과 9월초에 귀경, 복명(復命)하였다. 어윤중 일행만은 청나라를 거쳐 12월 14일 귀국, 복명하였다.
귀국 즉시 그들은 각자의 여행기인 문견기록과 함께 시찰보고서를 작성해 고종에게 제출하였다. 이들 기록은 100여 책에 달하는데, 전자는 시찰기류(視察記類), 후자는 문견사건류(聞見事件類)로 대별된다. 시찰기류에 나타난 조사대상 관서는 내무성 · 외무성 · 대장성 · 문부성 · 공부성 · 사법성 · 농상무성 · 육군 · 세관 등이고, 기타 포병공창을 비롯한 산업시찰을 했으며, 도서관 · 박물관 등 여러 문화시설을 골고루 조사하였다.
조사시찰단 파견의 의의를 요약하면, 첫째 조사시찰단은 기존의 북학사상에서 제기된 이용후생과 부국강병의 정책노선에 따른 것이지만, 파견의 대상국이 청나라가 아니라 일본으로 바뀌었다는 점이다. 둘째 조사시찰단 파견의 준비와 교섭 과정에서 조선정부는 높은 주체 의식을 보여주었다. 조선주재 일본공사에게는 조사시찰단단이 출발한 다음에 사후통첩을 하고 있으며, 여비도 우리 정부가 단독으로 부담하였다. 셋째 영남만인소로 대표되는 신사위정척사론이 제기되어 국내의 여론이 불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고종을 비롯한 집권층은 이를 파견함으로써 강렬한 개화의지를 보여주었다. 이 사행은 원래 고종의 일본에 대한 ‘물정상탐(物情詳探)’의 욕구에서 발단된 것으로서 원래의 목적은 달성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넷째 조사를 비롯한 수원 등 40여 명은 양반 출신으로, 그들은 견문을 넓히고 신문화에 대한 안목을 길러서 귀국한 뒤, 국내의 개화세력 증대와 한말의 정국에 끼친 영향이 적지 않았으리라는 추측이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