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풍양(豊壤). 초명은 조만화(趙晩和). 자는 경취(景翠), 호는 송간(松磵). 조운섭(趙雲涉)의 아들로, 조운철(趙雲澈)에게 입양되었다.
1864년(고종 1)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 1875년 6월 성균관 대사성이 되었다.
1881년에는 조사시찰단(朝士視察團)의 일원으로 40일 동안 일본의 행정·산업·교육 등을 시찰하고 귀국하여 신문의 필요성을 주장하였다. 그뒤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의 통리기무아문사(統理機務衙門事)가 되었고 통리기무아문의 12사(司)를 7사로 개편하였을 때 전선사당상경리사(典選司堂上經理事)가 되었다.
이듬해 임오군란으로 청나라의 마젠충[馬建忠]이 군대를 인솔하고 서울에 올라올 때 영접관(迎接官)이 되어 마젠충을 맞이하였다. 1883년 정월 통리내무아문을 개편하여 만든 협판군국사무에 임명되어 이무(吏務)에 종사하였고, 같은해 이조참판을 역임하였다.
1884년 갑신정변 후 개화당일파가 물러나고 내각이 조직될 때 개성유수가 되었다. 이듬해 협판내무부사를 거쳐 1886년 협판교섭통상사무(協辦交涉通商事務)에 전임하였다. 편저서로는 『일본문견사건(日本聞見事件)』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