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는 즉위하자 ‘계지술사숭유중도(繼志述事崇儒重道)’라는 시정방침과 ‘계지술사’의 기치 아래 자신의 세력 기반 내지 문화 정책의 추진 기관으로서 규장각을 내세웠다. 세조 때 발의되고 숙종 때 종정시(宗正寺)에 부설하여 여러 선왕들의 어제(御製) · 어서(御書)를 봉안하던 소규모의 도서관 성격의 규장각을 국가 권력의 핵심 기관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37세 이하의 참상 · 참하의 당하관 중 젊고 재능 있는 문신들을 의정부에서 초선하여 규장각에 위탁 교육을 시키고, 40세가 되면 졸업시키는 인재 양성의 장치를 강구한 것이 초계문신 제도이다.
이 제도의 법적 근거는 『경국대전』 예전(禮典) 장권조(奬勸條)의 ‘월과문신(月課文臣)’ 내지는 ‘전경문신(專經文臣)’에 두고 있다. 이는 조선 전기 사가독서(賜暇讀書) 제도나 독서당(讀書堂) 제도를 시대에 맞게 재편제한 것이다.
교육 과정은 과강(課講) · 과제(課製)의 강제(講製)가 주축이다. 전자는 매달 15일 전과 20일 후 두 번 행해졌고, 후자는 20일 후에 한번 실시되었다. 정조가 직접 교육에 임하는 친강(親講)은 매달 20일경에 적당한 날을 잡아 거행하고, 왕이 직접 시험을 보이는 친시(親試)는 매달 초하루에 행하였다. 이러한 방법으로 학문을 독려하고 인간적 접촉을 시도하였으며, 결국 친위 세력으로 포섭하였다.
1년 중 가장 추울 때와 더울 때에는 집에서 글을 지어 바치는 규정을 두어 학문 정진을 세심하게 배려하였다. 『대학』을 우선으로 하는 사서삼경(四書三經)의 성리학적 칠서(七書)가 주요 교과로 채택된 것은 전대와 다름없다.
그러나 내용에 있어서는 조선 성리학의 말폐 현상인 심성론(心性論)에 대한 지나친 공리공담(空理空談)을 배제하고, 과문(科文)을 위한 사장학(詞章學)을 견제하여 구두(句讀)보다는 문의(文義)에 치중하여 경전의 참뜻을 궁구하도록 하였다.
1781년(정조 5) 시작되어 1800년 정조가 죽을 때까지 10차에 걸쳐 138인이 배출되었다. 그 뒤 중단되었다가 1848년(헌종 14)에 다시 시작되어 2차에 걸쳐 56인을 뽑았다. 모두 12선(選)에 194인이 초계되어 재교육을 받은 것이다. 19세기 전반 공경대부의 태반이 이들 초계문신 출신이라는 기록으로 미루어볼 때,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전반의 시기에 있어서 초계문신 출신 관료들의 비중과 활동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