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광주(廣州). 호는 중곡(中谷). 이기석(李基碩)의 아들이다.
무과 출신으로 1864년(고종 1)부터 1868년까지 선전관(宣傳官)·금위영천총(禁衛營千摠), 승정원의 동부승지·좌부승지, 좌·우승지, 그리고 태안부사를 역임하였다.
1872년 전라우도수군절도사를 역임한 뒤 부사를 거쳐 1881년 초 조선조사일본시찰단(朝鮮朝士日本視察團)에 군계선함사차정참획관(軍械船艦事差定參劃官)으로 참가, 총포·선박 등 주로 육군조련(陸軍操鍊) 관계 분야를 시찰하고 돌아왔다. 이 때 이동인(李東仁)은 참모관이었다.
같은 해 9월 도총부부총관에 발탁되었다가 다시 충청도병마절도사로 전보되었다. 같은 해 11월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 개편에 따라 군무사당상경리사(軍務司堂上經理事)에 임명되어, 군무사분국절목(軍務司分局節目)의 결정에 따라 교련국구관(敎鍊局句管)이 되어 근대식 군부의 기초를 마련하는 데 기여하였다.
1882년 4월 황해도병마절도사를 거쳐, 같은 해 10월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다. 1885년 11월과 이듬해 4월까지 두 차례에 걸쳐 승급한 뒤 6월 한성부판윤에 승진하였다. 1887년 영국에 의한 거문도 강점사건이 일어나자 거문도경략사(巨文島經略使)로 임명되어 거문도사건의 처리를 위해 활약하였다.
1889년 대호군에 승급, 이듬해 재차 한성부판윤에 임명되었다. 1894년 갑오농민전쟁이 일어나자 양호순변사(兩湖巡邊使)가 되어 친군(親軍)의 장위(壯衛)·통위(統衛) 양영병을 인솔해 양호초토사(兩湖招討使) 홍계훈(洪啓薰)과 협력해 전주를 수복하였다.
그 해 갑오개혁으로 개화파 중심의 정부가 수립되자 좌포도대장에 기용되었다. 저서로 『일본육군조전(日本陸軍操典)』 4책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