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반남(潘南). 박영교(朴泳敎)와 철종의 사위인 금릉위(錦陵尉) 박영효(朴泳孝)의 아버지이다.
1870년(고종 7) 흥덕현감·도사 등을 역임하고 1871년 박영효가 부마가 됨으로써 많은 음직을 제수받았다.
1872년 공조참의에 제수되었고, 1873년 참판의 음직을 받았다. 1874년 도총부 부총관에 특별히 발탁되었으나 이해 법성전전첨사(法聖前前僉使)로서의 비행으로 암행어사가 치죄할 것을 요구하는 계를 올렸다.
1883년 공조판서가 되었다. 1884년 갑신정변 이후 박영효의 죄에 연루되어 대호군(大護軍)의 직위를 삭탈당하였다. 죽은 뒤인 1895년 일본에서 돌아온 박영효가 상소하여 관직이 복구되었다. 시호는 정간(貞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