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구당(守舊黨)은 19세기 말 명성황후와 민씨 척족을 중심으로 형성된 보수적 정치 세력으로 갑신정변을 일으킨 개화당과 대립하였고, 갑오개혁과 독립협회가 주도했던 개혁에 반대하며 구체제와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는 선에서 일부 개혁을 추진하려 했던 정치 세력이다. 외교적으로 친청(親淸) 노선을 취하며 청국에서 추진되던 개혁을 본받아 온건하고 점진적인 개혁을 추진하였다. 따라서 개화당(開化黨) 과 대립하였으며, 갑신정변 실패 후 다시 집권하였다. 이후에도 구체제를 토대로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일부 개혁만을 추진하려 하였다.
1873년(고종 10) 대원군이 하야(下野)하고 고종이 친정(親政) 체제를 구축하면서 명성황후와 민겸호, 민규호, 민태호 등을 중심으로 한 민씨 척족(閔氏戚族)이 권력을 얻게 되었다.
1876년(고종 13) 개항 이후 조선 정부는 새로운 기구인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을 설치하여 개화 정책을 추진하였다. 민씨 척족들은 개항 이후 개혁 추진을 위해 새롭게 설치한 통리기무아문[이후 통리군국사무아문(統理軍國事務衙門), 내무부(內務府)로 전환]을 비롯한 주요 기구에서 관직을 차지하며 세력을 키워 갔고, 고종의 뜻에 따라 개혁 정책을 추진해 갔다.
1882년(고종 19) 임오군란이 발발하여 권력 상실의 위기에 처했던 민씨 척족은 청의 도움을 받아 군란을 진압하고 다시 권력을 회복하게 되었다. 이후 민씨 척족을 중심으로 한 수구(守舊) 세력은 친청 외교 노선을 강화하는 한편 청국의 개혁을 본보기로 한 점진적 개혁을 추진하였다.
이와 같은 민씨 척족의 친청적이고 점진적인 개혁 노선에 반대하던 입장이었던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홍영식 등 급진적 개혁 세력은 1884년(고종 21) 12월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정변 과정에서 수구당의 중심 인물이었던 민영익이 중상을 입었고, 민태호, 민영목, 조영하, 한규직, 이조연 등이 살해당하는 등 큰 타격을 받았다. 청군의 무력 개입으로 정변은 3일 만에 실패로 돌아갔고, 민씨 척족을 중심으로 한 수구 세력이 다시 권력을 장악하였다.
갑신정변 진압 후 조선 내에서 청의 간섭은 더욱 심해져 갔고, 민씨 척족을 비롯한 수구당은 청에 의존하며 소극적이고 점진적인 개혁 정책을 추진해 갔다. 개항 이후부터 1890년대 중반까지 조선 사회에는 정치, 경제적 측면에서 많은 변화와 여러 가지 폐단이 발생하고 축적되어 농민들을 비롯한 민중들이 고초를 겪고 있었다. 하지만 수구 세력은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는 데에만 급급할 뿐 이러한 폐단을 바로잡으려는 정책을 추진하는 데 소홀하였다.
결국 1894년(고종 31) 농민들에 의해 갑오농민전쟁이 일어나고, 이 사건을 계기로 조선에서 청의 세력을 몰아내고 자국의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일본의 도발로 청일전쟁이 발발하였다.
조선 정부는 동학운동 농민들의 개혁 요구를 수용하는 한편 일본의 압력으로 인해 갑오개혁을 실시하기 시작하였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조선 정부 내 친일적 내각을 세우고 개혁을 추진하도록 하였다.
삼국간섭(三國干涉) 이후 조선에서 러시아의 영향력이 강해지자 이를 저지하기 위해 일본은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개혁을 계속 추진하게 했으나, 고종이 아관파천을 단행하면서 개혁이 중단되었다.
아관파천 후 고종은 민영기, 민영준, 심상훈, 조병식, 신기선 등을 중심으로 한 친러 수구파 정권을 수립하였다. 수구 세력이 다시 정권을 장악하면서 갑오정권이 추진했던 대부분의 개혁 정책을 중단시키고 구제도로 환원하려 하였다.
독립협회는 만민공동회를 통해 이러한 수구 세력의 움직임에 반대하고 나서면서 양측의 갈등이 고조되고 사회가 매우 불안정하였다. 수구파는 독립협회가 지속적으로 개혁을 요구하며 영향력을 확대해 가자 황국협회를 동원하여 독립협회를 해산시키려 획책하였다. 고종 황제가 조칙을 내려 독립협회를 강제 해산시킨 후, 수구 세력은 권력을 강화하고 구체제를 유지하며 고종의 의중에 따른 일부 개혁만을 추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