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순좌(舜佐), 호는 다옥(茶玉). 서울 출신. 부사 한승렬(韓承烈)의 아들이며, 한말에 참정대신을 지낸 한규설(韓圭卨)의 형이다.
1864년(고종 1) 19세로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에 제수된 뒤, 중추부경력(中樞府經歷)·함안군수·상주진영장(尙州鎭營將)·경흥부사·금위영천총(禁衛營千摠)·길주목사·경상우수사 및 좌수사 등 외방의 무관직을 역임하였다. 1881년 전라도병마절도사가 된 뒤 곧이어 좌변포도대장에 임명되었다.
1882년 초 잡아들인 용의자 5인을 혹독하게 다스려 죽게 한 죄로 순안에 유배되었다. 때마침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국왕의 특명으로 풀려나, 죄를 용서받고 다시 좌포도대장에 임명되었다. 이듬해 우포도대장에 개임되었다가 곧이어 총융사(摠戎使)가 되어 융단(戎壇)에 올랐다. 이어서 다시 어영대장으로 임명되어 사대당 내각의 중진으로 그 자리를 굳혀 갔다.
같은 해 9월 권지협판(權知協辦)이 되고 다시 공조판서·협판군국사무(協辦軍國事務), 군무사(軍務司)를 거쳐 신설 교련소인 친군전영(親軍前營)의 감독까지 겸임하였다. 1884년 초에는 다시 기기국(機器局)과 혜상공국(惠商公局) 총판을 겸하였다.
8월 전영사(前營使)가 되어 이전에 별도 설치된 연융대(鍊戎臺)를 통해 모든 군사 훈련을 통할하였다. 이때 그 동안 박영효(朴泳孝)가 양성하던 신식 군대까지 친군전영에 편입, 개화파로부터 군권을 빼앗아 이때부터 개화당과 반목하는 불편한 사이가 되었다.
같은 해 12월, 개화당이 우정국 낙성 축하연을 이용해 갑신정변을 일으키자 피신, 병졸로 변장하고 창덕궁으로 가 국왕을 만나려 하였다. 그러나 김옥균(金玉均)의 방해로 퇴궐하다 경우궁(景祐宮) 문전에서 이규완(李圭完) 등에게 살해되었다. 좌찬성에 추증되고, 충장(忠壯)이란 시호를 받았으나 훗날 충숙(忠肅)으로 고쳐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