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태호 ()

근대사
인물
개항기 임오군란, 갑신정변과 관련된 척신.
이칭
경평(景平)
표정(杓庭)
시호
충문(忠文)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34년(순조 34)
사망 연도
1884년(고종 21) 12월
본관
여흥(驪興: 지금의 경기도 여주)
관련 사건
임오군란|갑신정변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의
개항기 임오군란, 갑신정변과 관련된 척신.
개설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경평(景平), 호는 표정(杓庭). 민치삼(閔致三)의 아들이며, 민영익(閔泳翊)의 아버지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척사파 유신환(兪莘煥)의 문인으로 1870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여러 벼슬을 거쳐 1875년 9월 운요호사건(雲揚號事件) 때 경기도관찰사를 역임하였다.

그 뒤 민씨중심의 사대수구당의 중진으로서 김옥균(金玉均) 등의 개화당 세력과 대립하였다. 1880년말경 창설된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이 1883년 초 통리군국사무아문(統理軍國事務衙門:內衙門)으로 바뀌었을 때 독판(督辦)이 되었다. 또한, 장내사(掌內司)의 독판도 겸임하였다.

1882년 임오군란 때는 강화유수로서 개화파 각료와 함께 그 가옥을 소각당하였다. 그리고 정국수습을 위해 재집권한 대원군에 의해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서 판삼군부사(判三軍府事)가 되었다.

1884년 3월경 민태호의 아들 민영익이 전권대신으로 미국·유럽 등지를 둘러보고 왔을 때 민영목(閔泳穆)·민응식(閔應植) 및 그 아들과 더불어 사민체제(四閔體制)를 구축해 세도의 극을 달렸다.

총융사(摠戎使)·어영대장(御營大將)·무위도통사(武衛都統使)와 대제학을 역임하였다. 왕가의 외척으로 사대수구당의 대표적 인물로 활약하다가, 마침내 1884년 12월 갑신정변 때 김옥균 등 개화당 인사에 의해 민영목·조영하(趙寧夏)·이조연(李祖淵)·한규직(韓圭稷) 등과 함께 경우궁(景祐宮)으로 입궐하다가 참살당하였다. 글씨에 능해 전서·예서·행서·초서 모두 잘 썼다.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문(忠文)이다.

참고문헌

『고종실록(高宗實錄)』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일성록(日省錄)』
『고종기사(高宗紀事)』
『갑신일록(甲申日錄)』
『대한계년사(大韓季年史)』
『매천야록(梅泉野錄)』(황현)
『고종시대사』 1∼3(국사편찬위원회, 1970)
『한국사』 16(국사편찬위원회, 1975)
집필자
이현희
    • 항목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