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경평(景平), 호는 표정(杓庭). 민치삼(閔致三)의 아들이며, 민영익(閔泳翊)의 아버지이다.
척사파 유신환(兪莘煥)의 문인으로 1870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여러 벼슬을 거쳐 1875년 9월 운요호사건(雲揚號事件) 때 경기도관찰사를 역임하였다.
그 뒤 민씨중심의 사대수구당의 중진으로서 김옥균(金玉均) 등의 개화당 세력과 대립하였다. 1880년말경 창설된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이 1883년 초 통리군국사무아문(統理軍國事務衙門:內衙門)으로 바뀌었을 때 독판(督辦)이 되었다. 또한, 장내사(掌內司)의 독판도 겸임하였다.
1882년 임오군란 때는 강화유수로서 개화파 각료와 함께 그 가옥을 소각당하였다. 그리고 정국수습을 위해 재집권한 대원군에 의해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서 판삼군부사(判三軍府事)가 되었다.
1884년 3월경 민태호의 아들 민영익이 전권대신으로 미국·유럽 등지를 둘러보고 왔을 때 민영목(閔泳穆)·민응식(閔應植) 및 그 아들과 더불어 사민체제(四閔體制)를 구축해 세도의 극을 달렸다.
총융사(摠戎使)·어영대장(御營大將)·무위도통사(武衛都統使)와 대제학을 역임하였다. 왕가의 외척으로 사대수구당의 대표적 인물로 활약하다가, 마침내 1884년 12월 갑신정변 때 김옥균 등 개화당 인사에 의해 민영목·조영하(趙寧夏)·이조연(李祖淵)·한규직(韓圭稷) 등과 함께 경우궁(景祐宮)으로 입궐하다가 참살당하였다. 글씨에 능해 전서·예서·행서·초서 모두 잘 썼다.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문(忠文)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