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업 ()

수막새
수막새
과학기술
개념
점토나 비금속 무기재료를 원료로 열처리공정을 거쳐 도자기 · 벽돌 · 기와 등 생활에 필요한 물품을 만드는 제조업.
내용 요약

요업은 점토나 비금속 무기재료를 원료로 열처리공정을 거쳐 도자기·벽돌·기와 등 생활에 필요한 물품을 만드는 제조업이다. 유리와 시멘트, 법랑 등도 요업제품에 포함된다. 신석기시대 빗살무늬토기의 제작이 우리나라 요업의 시작이라 할 수 있다. 좁은 의미의 요업제품은 사기라 부르던 도자기를 말하는데, 전통시대 우리의 도자기 제작 기술력은 대단히 뛰어났다. 고려의 청자, 조선의 백자 등은 세계적 명품이었다. 현대에는 세라믹 등 고도의 기능을 가진 전기·전자제품 부속재를 생산하는 신요업 또는 정밀요업 분야가 새로 개척되고 있다.

정의
점토나 비금속 무기재료를 원료로 열처리공정을 거쳐 도자기 · 벽돌 · 기와 등 생활에 필요한 물품을 만드는 제조업.
개설

요업은 고전요업과 신요업으로 분류할 수 있다. 고전요업이란 천연자원에서 얻어지는 암석 및 점토 등을 기본원료로 한 비금속광물 자원과 여러 가지 산화물인 규산염을 결합하여 만든 성형체를 전통적인 방법에 의거, 고온에서 소결(燒結:가루 상태의 물질이 적당한 가압과 녹는점 이하의 가열에 의하여 덩어리로 굳어짐)시키거나 이들을 고온에서 주1한 다음 성형화하는 제조업을 뜻한다. 이의 대표적인 것은 도자기, 유리, 법랑, 보온기재 및 단열재와 같은 내화물, 석회 및 석고 등 시멘트, 연마재, 점토제품, 탄소제품 및 비금속 발열체 등이다. 한편, 요업에 관련된 제품이 구성하는 물질이 규산(SiO₂)을 주원료로 하고 있기 때문에 요업을 규산염공업이라고도 한다. 이들은 규산염이 뜻하듯이 산화규소가 주가 되어 있다. 신요업 또는 정밀요업이란 고순도의 원료 또는 이에 적당한 첨가물을 넣은 원료를 사용하여 잘 제어된 과정을 거쳐 그 미세구조를 제어함으로써 만든 고도의 기능을 가진 세라믹(ceramics)이라고 할 수 있다.

좁은 의미에서의 요업 제품은 옛날에는 모두 사기(沙器)라 하였다. 사기는 현재의 도자기를 말하는 것으로 도기(陶器)는 흡수율이 있는 것, 자기(瓷器, 磁器)는 흡수율이 없고 투광성이 있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이 두 가지는 대개 유약(釉藥)이 입혀져 있다. 유약이란 함은 태토(胎土:질그릇의 밑감으로 쓰는 흙) 위에 입힌 유리를 말한다. 자기와 유사한 것에 석기(炻器)가 있는데, 이것은 흡수율이 없고 투광성이 없는 것을 말하며, 고려청자나 조선백자는 투광성이 없기 때문에 엄밀히 말해서 모두 석기에 속한다. 토기라 함은 저온에서 소성(燒成:구워 만드는 것)하여 흡수율이 많고 유약을 입히지 않은 것이 대부분이다.

일반적으로 사기라고 하면 우리 나라에서는 예로부터 자기와 도기를 총칭해서 사용한 도자기를 가리켰다. 고려 이래 도자류를 청자 · 백자 · 녹자 · 청화자기(靑花磁器) · 화사기 · 화자기 · 청화자기(靑華磁器) 등으로 필요에 따라 세분하여 사용한 예도 있지만, 대체로 이를 구분하지 않고 자기 · 사기 · 도기 등으로 표기한 예가 많다. 사옹원(司饔院)에서 관장하는 관요(官窯:관아에서 운영하던 사기 가마)에서 번조(燔造:구워 만들어 내는 것)하는 모든 도자기를 거의 사기라고 하였고, 자기라는 용어가 약간 보일 뿐이다. 그리고 대개는 자기는 백자를, 도기는 분청사기를, 옹기는 김칫독과 같은 옹기와 질그릇을 지칭한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유리는 성분상으로 규산염유리 · 붕산염유리 · 인산염유리로 3대별하고 있으나, 제품상으로는 판유리 · 병유리 · 의료용유리 · 장식용유리 · 조명용유리 · 건축용유리 · 광학용유리 · 유리섬유 등으로 나눌 수 있다. 또, 법랑은 금속 표면에 특수한 유리를 엷게 입혀서 구운 것으로, 특히 동이나 금 또는 은판에 유리를 입힌 것은 칠보라 하고 기타는 법랑이라 한다. 그 밖에 기와 · 벽돌 · 시멘트 등의 제조도 전통요업에 속한다. 신요업 또는 정밀요업은 기능별로 전자기 · 기계 · 광학 · 열 · 생화학 및 핵 관련 분야로 나눌 수 있다.

상고시대의 요업

한반도에는 대략 기원전 40∼50만 년 전부터 기원전 1만 년 전까지 생활했던 구석기인들과는 직접 연결되지 않는 토기를 만드는 새로운 신석기 사람들이 이주해 산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 나라 신석기시대 사람들은 대체로 시베리아 일대에 퍼져 있던 고아시아족의 일부가 남하했다는 설이 유력하고, 신석기시대를 대개 기원전 6000∼1000년경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선사시대라 함은 역사 이전시대를 말하고, 우리 나라에서는 삼국시대 이전을 말한다.

신석기시대를 대표하는 토기는 빗살무늬토기이다. 우리 나라에서는 이 시대의 유적지를 4기로 나누고 있는데, 제1기를 기원전 4000년 이전으로 보고 있다. 제1기 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진 것이 강원도 양양군 손양면 오산리에서 출토된 것으로, 기원전 5170∼4830년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토기는 사발모양으로 작은 굽을 가지고 있는 것과 굽이 없이 둥글게 처리한 것이 있다. 표면장식은 바깥면 상단에 마치 손톱자국과 같은 반원형무늬를 몇 줄 나란히 내고 있는 토기와 덧띠를 붙인 다음 점선을 나타낸 것이 있다.

또, 함경북도 웅기군 굴포리, 부산광역시 영도구 동삼동, 경상남도 통영시 상노대도(上老大島) 등의 조개더미[貝塚]에서 출토된 민무늬토기는 빗살무늬토기보다 하층에 있는데, 최하층에서는 방사성탄소연대가 기원전 4790∼4405년으로 추정되었고, 민무늬토기와 함께 덧띠무늬토기[隆起文土器] · 누른무늬토기[押捺文土器]들이 같이 출토된다. 이것은 빗살무늬토기 사용 이전에 다른 문화 계통의 사람들이 존재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제2기인 기원전 4000∼3000년대의 특징은 서해안의 빗살무늬토기에서 가장 뚜렷하게 신석기시대를 대표한다. 이 당시의 주거지는 압록강 · 두만강 · 한강 · 낙동강 등 강변이나 해안의 약간 경사진 모래사장에서 발견된다. 당시 토기의 형태는 밑이 뾰족하거나 둥글고 윗부분은 곧바르다. 태토는 운모질이 많이 섞인 사질점토로, 이것을 반죽하여 길게 끈같이 늘여 코일을 감아 올리듯이 빙글빙글 돌려 그 지름을 줄여가며 감아 올리는 방법과, 반지와 같이 배토(坏土:질그릇의 원료가 되는 흙)를 동그랗게 만들어 원추형 모양으로 쌓아 올리는 테쌓기식 방법이 흔히 쓰였다. 그리고 그 이음새는 안과 밖에서 문질러 매끈하게 한다.

그릇의 크기는 입지름 50㎝, 높이 40㎝에 이르는 큰 것이 있다. 무늬는 큰 생선의 등뼈 같은 도구를 가지고 빗으로 머리를 빗어 내리듯이 그릇 표면을 긁어 빗살무늬를 나타내는데, 지역에 따라서 특징이 다르다. 무늬는 입가 부분 · 배 부분 · 밑 부분의 세 부분으로 나누어 시문했는데, 오산리토기는 입가에만 단사선무늬[短斜線文]가 세 줄 있는데, 서울특별시 강동구 암사동 유적에서 출토된 빗살무늬토기는 입가에 있는 3, 4줄의 단사선무늬와 배 부분에 파도를 연상시키는 지그재그식 빗살무늬가 시문되어 있고, 밑 부분은 입가의 단사선무늬보다 약간 길게 좌사선(左斜線)과 우사선(右斜線)으로 어긋나게 무늬가 새겨져 있다. 이것과 유사한 양상을 보이는 것에는 황해도 봉산군 지탑리의 것이 있다.

제3기(기원전 3000∼2000년경)가 되면 중국 화북지방 채색토기의 영향을 받아 표면 무늬는 곡선 위주로 되고 뾰족하던 굽은 납작해지거나 또는 굽이 달리며 입가는 안으로 오므라드는 매우 발달된 기형으로 변화를 보인다. 그러나 지역에 따라서는 특색이 달리 나타난다. 예컨대, 지탑리 후기에 속하는 토기는 곡선무늬가 중심이며, 함경북도 청진시 농포동(農圃洞)에서는 돌림무늬토기가 특색을 보인다.

제4기(기원전 2000∼1000년경)는 신석기시대문화가 종말을 고하고 청동기시대로 전환하는 때이다. 기형은 보다 기능적으로 되어 속이 깊은 사발, 밑이 평평하고 목이 긴 단지와 같은 모양이 현저하게 증가하며, 무늬도 생략 또는 도식화 경향을 띠면서 변화한다. 대동강 유역 평양 금탄리(金灘里)에서 출토된 빗살무늬토기의 경우 좌사선 · 우사선 무늬를 서로 바꾸어 가며 전면을 메우는 빗살무늬의 도식화가 현저해지면서 밑이 둥근 민무늬토기도 같이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민무늬 경향이 현저하다. 두만강 유역에서 출토되는 것은 서포항 3기층의 토기가 대표적인데, 사발 · 단지 및 직사선의 측면선을 가진 밑이 평평한 항아리 등의 기형에 조잡한 점렬무늬 · 돌림무늬의 변형으로 보이는 고사리무늬 같은 것이 시문되고 있다.

청동기시대는 우리 나라에서는 대략 기원전 1000년경으로부터 서력기원 전후로 추정되고, 중국에서 철기문화와 함께 한자와 유교문화가 들어오면서 청동기시대는 서서히 철기시대로 들어가는데, 이 시기를 대략 기원전 3세기경으로 보고 있다. 또, 이때를 초기철기시대로 설정하고 있다.

이 청동기시대를 민무늬토기 문화시대라고도 한다. 토기의 제작기법은 테쌓기방법이 주로 사용되었으며 노천에서 구웠으므로 그다지 단단하지는 못하였다. 기형은 실용적인 항아리, 속이 깊은 사발 등과 같은 모양을 기본으로 하여 대접 · 굽다리자[豆形土器] 등 일상 용기의 일면을 보여주며, 양측면에 손잡이가 달려 물 · 술과 같은 음료를 나르는 데 편리하도록 된 기형도 있다. 때로는 칠무늬토기[彩文陶]와 같이 장식적인 무늬가 시문된다. 이러한 것은 그릇에 채색을 넣음으로써 특수한 용도의 의미도 있었겠지만, 주위를 아름답게 꾸미려는 한 단면을 공예물에서 찾아볼 수 있는 예이기도 하다.

화주(火珠)는 황룡사구층목탑에서 나온 것으로 『동경잡기(東京雜記)』에 의하면 “모양은 바둑알 같고 수정처럼 밝은 빛이며, 들어서 물체에 비춰 보면 더 잘 보이고, 햇빛을 모아 헝겊에 쬐면 불이 나서 헝겊을 태운다.”고 한 것으로 보아 수정렌즈가 분명하다. 이것은 7세기 초에 중국을 거쳤거나 인도에서 직접 신라에 들어왔을 것으로 생각된다. 또, 볼록거울과 오목거울이 있다. 볼록거울의 유물은 기원전 6세기경의 유물에서, 그리고 오목거울의 유물은 기원전 2세기경의 유적에서 발견된 것으로, 이들은 우리 나라에서 만들어졌다는 확증이 없다.

경상북도 경주시 내남면 덕천리 성부산(星浮山) 기슭에서 유리 노지(爐址)로 보이는 유적이 있어 신라시대에 유리를 만들었을 것이라고 보도된 바 있으나 화학 분석 결과 유리가 아니고 철재(鐵滓)라는 것으로 밝혀졌기 때문이다. 청동기시대의 동제련에는 성부산에서 출토된 야철로(冶鐵爐)보다 훨씬 간단하게 점토제품으로 만든 도가니 같은 것을 썼을 것으로 본다. 철은 1,600℃ 이상이어야 녹고, 동에다 주석 · 납 또는 아연 같은 것을 섞어서 녹이면 1,000℃ 미만에서 녹기 때문이다.

기와는 중국 하나라시대에 곤오(昆吾)가 만들었다는 기록이 『고사고(古史考)』에 실려 있고, 주나라 때 사용된 기와가 현재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진나라와 한나라에 이르러 기와가 매우 성행하였다. 우리 나라에 기와가 들어온 시기는 한나라의 무제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한사군(漢四郡)을 설치한 때를 전후하여 한반도 북반부에 목조기와집의 새로운 건축기술이 등장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것은 대동강 하류 대안에 있는 대동강면(大同江面) 낙랑군 때의 유지(遺址)에서 발견된 기와조각과 벽돌조각이 있다. 현재 이 지역이 토성이라고 불리는 곳이다.

이곳에서 발견된 것은 모두가 한나라의 양식을 지니고 있다. 특히, 기와의 무늬에 ‘낙랑예관(樂浪禮官) 대진원강(大晉元康)’이라고 돋을새김된 것이 출토되어 있고, 벽돌에는 후한(後漢)의 연호인 흥평(興平)을 나타낸 것도 있다. 중국의 만리장성이 기원전 7세기부터 벽돌로 축조를 시작하였으니 그때가 춘추시대이므로 벽돌은 기와보다 좀 늦어 기원전 10세기 이전부터 만들기 시작하였으리라고 보지만, 본래 벽돌과 기와는 원료가 같고 벽돌이 기와보다 만들기 쉬운 점으로 보아 기와보다 앞서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고대의 요업

토기의 획기적인 발전은 서력기원을 전후한 때에 김해지방에서 이루어졌다. 김해인은 이 땅에 살고 있던 원주민들의 무문토기에 새로 철기와 함께 들어온 중국식 주2 기술을 가미하여 아주 새로운 경질토기를 발명하였다. 이것이 주3이다. 이 토기는 수비된 진흙을 원료로 하여 물레를 써서 성형하고 1,000℃ 이상 되는 온도에서 구워 만들었다. 그리고 가마는 이전의 원시적인 개방가마 대신 화력을 높일 수 있는 등요(登窯)를 썼다고 믿어진다. 이 등요는 그 뒤 조선 말에 이르기까지 우리 나라 사기가마의 모체가 되었다고 본다. 그래서 이 토기는 높은 온도로 구울 때 변형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안에 받침을 대고 밖에서 방망이로 두들겨 기벽을 단단하게 하는 공정을 거쳤다. 그렇지만 이 토기는 개방가마의 전통을 남긴 산화 분위기에서 구워진 밝은 갈색과 환원 분위기에서 구워진 회색의 두 색을 나타내고 있다. 이렇게 김해토기는 신라의 회색 경질토기로 발전하는 새 기술의 모체가 되었다.

백제의 요업

백제토기는 청동기시대의 기법을 계승받아 산화염인 원시적인 기술에서 탈피하여 환원염으로 구워 내는 지하구조 또는 반지하구조의 가마를 개발함으로써 저온에서 구워 내는 연질 적갈색 토기를 비롯하여 고화도에서 구워 내는 도기질 또는 석기질의 경질 회청색 토기를 생산하였다. 현재까지 밝혀진 백제 토기의 종류는 적갈색 연질토기 · 회청색 경질토기 · 흑색 연마토기 · 도자기 등으로 대별되고 있다.

전시대에 걸쳐 생산된 작품으로 적갈색 용기 중의 연질토기의 재질은 비교적 왕모래와 유기질이 많이 들어 있는 질[胎土]을 사용한 질그릇계이다. 이 질그릇계 토기 중에는 치밀하고 정선된 양질의 질을 사용한 것도 있다. 이 연질계 질그릇은 흡수성이 강하고 대체로 700∼800℃의 산화염으로 구워진 것으로 표면은 적갈색 또는 황갈색을 띠고 있다. 특히, 적갈색 연질계 토기는 백제 전기를 통하여 출토되며, 한강 유역을 중심으로 분포된 초기 고분에서는 경질토기보다 비교적 많은 종류가 눈에 띈다.

5세기경 백제시대에 구워 만든 경질토기는 한쪽을 홀쭉하게 해서 구경이 큰 쪽에 쑥 끼워넣게 되어 있는 상수도용 토관이 보이는데, 토관을 만들 때 방망이에 삼베천을 감아 안에 끼고 겉을 두드려서 터지지 않도록 단단하게 구워 낸 것으로 지금까지 동양에서 발견된 수도시설 중에서는 가장 짜임새 있고 시설하기 쉽고 위생적이라는 점에서 그 창조적 노력을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다.

이때의 벽돌은 주4에서 많이 발견된 것이다. 전곽이란 널방[玄室]의 벽을 벽돌로 구축하고, 바닥은 보통 주5 두 장을 겹쳐서 깐다. 또 그 앞면에 주6라는 입구가 있는데, 이곳도 벽돌로 되어 있다. 그리고 당시에는 이들 벽돌을 쌓는 데 석회를 쓰고 있었다. 우리 나라에서는 신라시대에 지은 경주 불국사에 돌로 아치브릭을 만들었는데, 이미 기원전 2∼1세기에 벽돌을 아치브릭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전돌은 오늘날 보는 보통 벽돌보다는 크고 흑회색이며 내면에는 여러 가지 무늬가 있다. 질은 단단하지 않으며 크기는 길이가 약 33㎝, 너비가 약 절반인 15㎝, 두께가 6㎝ 정도로 현재의 벽돌보다는 매우 크다.

백제 벽돌이 공주의 무령왕릉에서 발견되었다. 벽돌의 길이 33㎝ 내외, 너비 15㎝ 내외, 두께 5㎝이고 마구리면에 반연화문과 귀 부분에 당초문을 넣어 두 장을 합치면 완전 연화문이 나타나게 한 것 등 여러 가지가 출토되었다. 또한 장방형과 사다리꼴로 되어 그 면에는 새끼줄무늬가 나타나 있고, 옆면에는 무늬나 글자를 돋을새김하고 있는 것이 있다. 또, 송산리에서 발견된 벽돌도 있다. 부여 부소산성(扶蘇山城) 안에는 옛날의 기와 · 도기의 파편이 온 바닥에 산재해 있었다. 주7는 여러 가지가 있었으나 모두 백제의 기와장이가 일본에서 만들어 아직 남아 있는 아스카시대(飛鳥時代)의 것과 유사한 것이 많다.

고구려의 요업

고구려가 건국된 지역인 압록강 · 훈강 유역에는 4세기 이전에 만들어진 것은 바닥이 평평하고 배가 부르며 입가가 외반(外反)되어 있는 항아리와 몸통 양쪽에 물동이형 손잡이가 달려 있는 형태의 토기를 회색 계통의 연질토기로 만들고 있는 것이 특징이며, 이것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이 밖에도 고구려 토기에는 황록 · 황갈색의 연유토기(鉛釉土器)가 많이 출토되고 있는데, 이러한 시유토기는 보다 정교하게 만들어져 있어 부장용(副葬用) 토기로 특별히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회도(灰陶) · 흑회도 · 황록유도 · 채문도 등이 알려져 있다. 만주 집안현(輯安縣)에 있는 태왕릉(太王陵)천추총(千秋塚)에서 문자명(文字銘) ‘한(寒) · 천(川)’이 있는 벽돌이 출토되었고, 이들 벽돌은 비교적 작고 얇다. 대개 석총(石塚)의 각 방의 단상을 덮기 위해 막새기와나 내림새기와와 같이 쓰여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신라의 요업

신라 토기는 그 기술적인 공정에서 김해토기의 제작기술과 별다른 차이가 없다. 다만 더 세련되고 숙련된 기술로 발전해 나간 결과로, 신라 토기는 도기와 자기의 중간인 경질토기를 낳은 것이다. 신라 경질토기는 김해토기와 마찬가지로 아주 고운 정선된 진흙을 원료로 하고 있다. 그리고 물레를 써서 기형(器型)을 아름답게 만들었으며, 기벽을 단단하게 하기 위해서 방망이로 기면을 두들겼던 것도 김해토기에서 사용된 방법이다. 한 가지 가장 뚜렷한 것은 그 가마의 구조가 통굴로, 현재까지 전통 도예가마에서 쓰고 있는 등요와 마찬가지 기능을 가지고 소성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신라 토기는 그 전보다 더 높은 온도로 환원염에서 구워져 갈색 계통의 색깔은 완전히 사라지고 회색계통의 단조롭지만 우아한 색깔이 창조되었다.

이러한 가마의 구조와 시설의 발전은 이 시기에 건축용 자재로서의 기와와 벽돌의 대량생산에 의해서도 자극되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기와와 벽돌의 제조기술, 특히 형태를 틀에서 뽑아내고, 무늬를 인형(印型)으로 찍어서 돋쳐 내는 장식적 및 규격적 제작방법은 필시 토기의 형태와 표면처리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실제로 통일신라시대 토기들의 무늬는 바로 그런 방법으로 도장으로 찍어서 새겨진 것이다.

신라시대의 벽돌과 기와는 신라 도읍지인 경주 부근의 궁전터 · 절터에서 많이 출토되고, 근래에 발굴된 안압지 · 황룡사지 · 감은사지 등에서 수려한 꽃무늬 벽돌이 출토되었다. 안압지에서 출토된 바닥깔기 벽돌은 민무늬도 있지만 꽃무늬가 있으며, 정방형 · 장방형 · 삼각형 벽돌이 있다. 또 면에만 무늬를 넣은 것도 있고, 옆면에도 넣은 것과 직교하는 양쪽면에 넣은 것도 있다. 무늬 벽돌 측면에 ‘조로 2년(調露二年)’이라는 명문이 있는데, 이것은 신라 문무왕 20년으로 680년에 해당된다. 측면에는 한 면에만 보상화당초문(寶相花唐草文) 속에 사슴을 배치한 것도 있다.

통일신라의 요업

통일신라시대는 7세기 말엽에서 10세기 초에 해당되는데, 이 시대의 토기는 뚜렷이 세 종류로 구분된다. 즉, 부장품토기 · 화장골호 · 안압지의 일상생활 용기이다. 고신라시대 무늬의 특색인 예리한 주8 대신에 타압(打壓), 압날(押捺)한 주9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고신라토기는 제기적(祭器的)인 데 반하여 통일신라토기는 실용적인 기형을 갖추고 있다. 안압지 토기를 주의깊게 보면, 주10 · 술통형토기 · 항아리 등 고신라의 전통을 이은 기형이 있는가 하면, 사발 · 접시 · 병 등과 같이 중국의 청동기라든지 도자기에서 비롯된 것이 눈에 뜨인다. 대체로 고배류는 초기의 기형이며 병류는 말기의 것으로 여기고 있으나, 사발 · 접시 등 일상 용구는 기형의 변화 없이 장기간 계속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높은 것들이다.

8세기를 전후한 시기에 이르면서 토기의 표면에 유약을 바르는 수법이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유약은 삼국시대의 신라 토기에서는 가마 속에서 재가 날아 붙어 연한 녹색의 자연유가 부분적으로 나타난 경우가 있지만, 이때부터는 황갈색 또는 황록색의 인공유가 나타났다. 이 유약은 규산납에 산화동이 들어가서 황록색을 띠거나 또는 납에 산화철이 섞여서 황갈색을 나타냈을 것이다. 이들은 낮은 온도(1,000℃ 미만)에서 녹을 수 있는 납유약에 속한다. 이와 같은 납유약은 2세기 초반에 중국에서 이미 사용되어 왔다고 한다. 와전(瓦塼)이 경주 부근의 궁전터 · 절터 또는 당시의 각 지방 고찰 · 유지(遺址) 등에서 많이 발견되었다. 벽돌은 네모지거나 직사각형이며, 표면이나 측면에 섬세한 보상화무늬를 돋을새김하였다.

고려시대의 요업

고려청자는 7세기 무렵에 이루어져 있던 삼국시대의 시유기술에서 싹튼 기술의 축적, 고화도 환원염으로 구워 낸 석기질 신라 토기의 소성기술이 진보함으로써 생겨난 자연유(自然釉)의 경험 및 통일신라시대의 납유약계 녹유(綠釉) 기법이 다양하게 개발되고 육조청자 · 당백자 · 당청자 등을 도입한 데서 자극을 받아 이루어진 것이다. 9, 10세기 무렵 초보적인 청자상태의 녹청자에서 비롯하여 10세기 말경 백자가 만들어졌다. 11세기가 되면서 청자의 자토(赭土)와 백토로 무늬를 나타낸 철회청자 · 퇴화문청자가 발달되었고, 뒤이어 진사청자가 나타났으며, 다시 상감의 기법을 독자적으로 창안하기에 이르렀고, 이에 화금(畫金) · 철채 · 철사유 · 흑유 등 실로 다종다양한 도자기가 찬란한 꽃을 피우게 된 것이다.

고려청자가 절정기를 이룬 시대는 12세기 전반기인 예종에서 인종까지, 이른바 비색(翡色) 청자시대로, 기형과 의장 등 조형감각과 기술에 분명한 국풍화 경향을 짙게 나타내게 되었다. 이것은 소문순청자 · 상형청자 · 청자양각 그릇 · 청자음각 그릇 · 청자진사채 그릇 · 철회 그릇 · 백자류 및 백자상감 그릇들에서 엿볼 수 있다. 이러한 우리 나라 도자기사에서 절정기를 바탕삼아 우리 나라 고유의 상감청자가 창시되었으니 이때가 바로 의종 때였고, 몽고군이 침입하여 강화도로 고려정부가 천도하기 시작할 때까지의 약 80년간이 그 절정기였다.

청자의 전성기를 이루었을 때는 요지(窯趾)가 825개 소에 달하였다. 당 말 오나라 때의 중국 청자기술이 우리 나라에 도입된 북방계 청자는 황해를 건너 인천의 경서동 청자 요지를 비롯하여 충청남도 서산 등 황해 연안지대에 남아 있는 일련의 초기 요지들 쪽에 들어오고, 중국 항저우만(杭州灣) 연안의 오대 · 송대의 월주계 환원염기법이 해로를 타고 전라남도 강진을 비롯한 전라북도 부안 등에 토착한 것으로 보인다.

초기 청자, 즉 녹청자는 토기를 만들던 타조법(打造法)을 써서 기벽이 얇고 회유계의 태토에 모래 등 잡물이 많기 때문에 유약이 고루 퍼지지 않아 유약 자체의 용융점은 높으나 실제 화도는 좀 낮아서 유면에 요철이 생겨 있다. 이때, 즉 10세기의 소성법을 보면 내화점토와 모래를 빚어 받친 눈[目]이 크며, 여러 개를 포개서 구웠기 때문에 안팎에 그 자국이 크게 남아 있으며, 주11, 즉 내화갑을 쓰지 않았다. 그리고 태토는 반자기질이며 회유를 입히고 있다.

11세기에 들면서 녹청자의 단계를 벗어나 태토가 정선되고 유약이 태토와 밀착되어 표면이 매끄러워졌다. 유약은 전면에 칠하고 굽다리 밑의 유약만을 훑어낸 다음 대부분 내화토를 빚어 받쳐 소성했는데, 유약을 훑어낸 자국은 적갈색이며 윤이 난다. 유태(釉胎)가 모두 경질이며 유약은 암록색을 띠는 것이 많고, 때로는 회색과 암회색 · 담갈색을 띠는 것도 있으며 기포가 크고 많다. 연한 하늘색으로 두껍게 시유한 것과 엷게 시유하여 미세한 빙렬(氷裂:얼음이 갈라진 금 모양의 무늬)이 풀색을 머금은 연질의 태토에 나타난 것도 약간 섞여 있다. 번조(燔造) 때 포개어 구운 것이 차츰 줄어들고 대부분 갑발을 사용하였다.

12세기 전반에 이미 상감기법이 고려인의 창의로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청자의 태토 위에 음각무늬를 새기고 그 새겨진 각흔(刻痕) 안에 자토나 백토를 메워 놓은 다음 시유하여 구워 내면, 자토는 흑색으로 백토는 백색으로 색이 나타나는 것이다. 이때 산화동이 환원되어 주홍색 무늬를 장식하는 진사채가 개발되고, 연리문(練理文) 자기가 만들어졌다. 12세기 초부터 상감이 만들어지기 시작했으나, 이때가 순청자의 전성기로 유약은 반실투성이로 기포가 많으며 얇게 시유되고 녹색이 아주 은은한 비취색이며 유면이 매끄럽고 빙렬(氷裂)이 없다. 태토는 정선되어 잡물이 없고 보라색을 약간 띤 듯한 회색으로 단면이 아주 곱고 깨끗하다.

12세기 중엽에서 1231년 무렵까지는 청자상감의 전성시대를 이루었는데, 이때 상감기법이 다양화되고, 독자적인 주제와 내용을 갖추게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상감기법의 정치화(精緻化)로 청자유의 투명도가 향상되었다. 이 전성시대의 유조(釉調)는 유약질의 경도가 높아짐에 따라 빙렬이 온 몸체에 생기는 것이 일반화되었고, 색감에도 고려청자 특유의 풍격이 자리를 잡기에 이르렀다. 유약에 기포가 줄어들고 약간 두꺼워졌으며, 밝고 투명하여 상감 문양이 투명하게 보인다. 작은 접시류는 모두가 모래눈을 받쳐 소성하고 큰 병이나 주전자류는 내화토와 모래를 빚은 눈을 받쳐 소성하고 있다.

12세기경의 요지로 알려진 전라남도 강진군 대구면 용운리 및 사당리에서 발굴한 청자의 태토, 유약, 내화갑, 요지 근처에 있는 점토를 각각 화학 분석한 결과를 보면, 유약에 들어 있는 산화철이 태토에 들어 있는 것보다 적다. 태토에 들어 있는 철분도 지금까지의 결과보다 좀 높아서 3%에 이르고 있다. 내화갑에 들어 있는 알루미나가 다른 성분에 비해 많은 것은 내화갑에 쓰는 점토를 선별하여 내화도가 높은 점토를 쓴 것이 분명하다.

이들로 미루어 보아 통일신라시대 말에 청자가 이미 만들어지기 시작했고, 이때 청자의 품질을 좋게 하기 위해 9세기부터 내화갑을 쓰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내화갑 깨진 것은 등요를 만들 때 아치형 천장에 덮어씌워 보온작용을 보완함으로써 연료를 절약하는 데 이바지했으리라고 본다.

장방형 벽돌이 황해도 개성 만월대에서 많이 발견되었다. 그 표면에는 보상화 · 연화문(蓮花文) 등을 부각하고 있다. 이것은 아마 담벽 축조와 장식에 쓰였을 것이다. 고려 초기의 기와는 통일신라시대의 전통을 계승하여 연꽃무늬와 당초무늬가 새겨진 막새기와가 주류를 이루었으나, 점차 귀목무늬[鬼目文]가 돌발적으로 채용되고 청자기와가 만들어져 이채를 띠게 된다. 고려 후기에 이르면 원나라의 자극을 받아 범자(梵字)가 새겨진 막새기와가 나타나는 동시에 암막새의 드림새가 역삼각형으로 변형되면서 조선시대까지 계속된다. 그런데 이때는 이미 둔각을 이루는 이음수법이 보이고, 막새 뒷면에 포목흔적(布木痕迹)이 남아 있어서 전통적인 기와의 형태에서 크게 벗어난 퇴락된 모습임을 느낄 수 있다.

조선시대의 요업

조선시대의 도자기는 고려 말 퇴락한 청자의 여맥을 이어 발전한 조선청자와 고려 말 청자에서 완전히 변화된 분청사기가 있으며, 고려백자계를 이은 초기 백자와 이와 병행하여 원 · 명 때의 백자 · 청화백자의 새로운 영향으로 발전된 조선백자가 있으며, 이 밖에 흑유 · 철유 등이 있다. 이러한 여러 종류 중 조선 자기의 주류는 분청사기와 백자이다.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자기소 136개 소와 도기소 185개 소가 있는데, 자기소에서는 백자, 도기소에서는 분청을 만들었다.

분청사기는 인화문 · 상감문이 먼저 발달하여 주12 · 주13 · 주14 · 주15 · 분장문 등 백토 분장의 변화로 여러 가지 다양한 모습이 되었다. 이러한 분청사기는 15세기 초기에 기형과 문양 · 유약 등에서 이미 분청사기로서의 특징을 나타내어 인화문 · 상감문 · 박지문 · 조화문계는 세종 · 세조대까지, 철화문 · 귀얄문 · 분장문계는 성종대까지 거의 완성을 보였다.

조선백자는 15세기 말경 원 · 명의 영향으로 새롭게 발달한 단단하고 치밀한 백자가 주류인데, 임진왜란까지 기형과 유약 등이 그대로 지속되며, 죽절굽이 점차로 없어지고 모래받침 번조로 일관한다. 임진왜란 후 곱게 정리하던 굽이 점차 투박해져 가는 모래받침 번조에서 굵은 모래받침 번조로 변하였다. 이러한 번조가 17세기 초엽까지 그대로 계속되며, 병자호란 이후 인조 말경에 광주의 중앙 관요에서 국풍화된 청화백자를 생산하기 시작했는데, 전기보다 희고 밝고 광택이 있으며 조금 두껍게 시유되어 모래받침도 덜 거칠고 각이 진 그릇이 많다.

광주 관요가 금사리에서 분원(分院)으로 옮긴 후기에 태토는 정선되고 기면은 전체가 매끈하게 정리되었으며, 유약은 빙렬 없이 약간 푸른 기를 지니며 태토와 분리되는 경우가 없었다. 굽다리는 두꺼우며 굽의 안 밑은 위로 깊이 깎아내고 모래받침 번조이며, 말경에는 내화토받침을 하고 있다. 백자는 순도 높은 백토로 그릇을 성형하고 그 위에 어떤 채료와 기법으로 문양을 나타내느냐에 따라 순백자, 청화백자, 백자상감, 백자철화문(석간주문백자), 백자진사문, 기타 흑유, 철채, 철사유 등으로 구분된다.

분청사기는 분장회청사기의 준말로, 청자와 같이 회색 또는 회흑색 태토 위에 백토로 표면을 분장하고 그 위에 회청색의 유약이 시유된 사기를 말한다. 이 분청사기는 조선 초기에는 퇴락한 상감청자에서 출발하여 인화문과 상감문이 먼저 분청사기의 특성을 갖추며 발달하였다. 인화문은 주로 커다랗고 단순화되며 변형된 국화변 등이 듬성듬성 시문되다가, 시문이 늘어나고 개체의 문양이 점차 작아진다. 다시 이것이 개체가 아닌 점차 집단문양으로 기면 전체를 메워 표면이 백토화랑으로 거의 빈틈없이 메워졌을 때가 그 절정에 달한 시기이다.

태토는 점차 수비하여 15세기 중엽에는 질이 좋은 태토를 사용하고, 기형은 고려 말기의 둔탁하고 변화 없는 형태의 선문에서 상쾌하게 또는 힘 있는 곡선으로 변화를 보게 된다. 대접 · 접시 등 구연부(口緣部)의 외반(外反)과 매병(梅甁)의 어깨에서 굽에 이르기까지 굽이치는 듯한 곡선에서 고려 말 청자보다 현격하게 변화한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유약은 최초에는 고려 말의 청자유와 같았으나 점차 중성염이나 환원반조로 되고, 유약 내의 철분함유량이 청자보다는 미량으로 약간의 청색을 머금은 회백색이거나 또는 약간의 황갈색을 머금은 투명한 백색의 유약이 얇게 시유되어 회색인 태토의 발색이 유약을 통해 명확하게 비쳐 보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따라서 표면색이 회청을 띠는 것이 많다. 분청사기는 여러 가지 분장법에서 오는 힘 있고 자유분망한 장식의장(粧飾意匠)이 그 특질의 하나로, 그 문양의 표현기법에 따라 분청사기 인화문 · 상감문 · 조화문 · 철화문 · 귀얄문 · 분장문 · 철사문 · 토기 등으로 분류할 수 있다.

조선 초기의 백자는 두 가지 질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고려백자의 계열을 이은 것으로, 기형은 부드러운 곡선이 주조(主調)가 되고 기면의 정리가 매끄러우며, 유약은 투명하고 일부 산화번조가 있는 것 같다. 광택이 있으며 미세한 빙렬이 있고 대체로 번조시 태토와 밀착되지 않아 유약이 떨어지는 경우가 많다. 또 하나는 원대부터 일부 고려자기에 약간의 영향을 미치던 원나라의 도자기가 원말 명나라 초에 조선자기에 큰 영향을 주어 새롭게 발달한 백자이다. 이 백자는 유약이 대체로 얇게 시유되며, 빙렬이 없는 경우는 백색이고, 미세한 빙렬이 있는 경우는 태토에 따라 조금씩 다르나 약간의 청색을 띤 회백색인 것이 많다. 기형은 곡선이 주조인데 풍만한 양감을 지니고 표면을 매끈하게 정리한 것이 있으나 유약은 광택이 은은하고 단단하고 견치한 것이 특징이며, 환원번조 일색이다. 백자는 순백자 · 청화백자 · 백자상감 · 백자철회문 · 백자진사문 · 흑유 등으로 구분된다.

일제강점기의 요업

1883년 광주분원이 일제에 의해 폐쇄되고 민영화가 되었다고 하나, 그 뒤부터는 일본의 도자기를 우리 나라에 수출해서 팔았다. 민영화가 된 뒤 일본인이 이곳에서 두세 번 청화백자를 번조했다는 설도 있다. 1916년에는 경성공업전문학교에 요업과를 설치했다가 1922년에 이 학교가 경성공업고등학교로 되면서 요업과가 응용화학과에 흡수되었다. 또한 1917년에는 일본 경질도기가 부산에 도기공장을 설립하여 주로 백자 계통의 생활자기를 만들었다. 이 공장은 당시 최신식 가마인 각가마를 설치하고 손으로 빚던 성형방법이 기계 물레를 쓰게끔 근대화되어 있었으며, 구식제조방법을 탈피하였다.

그 뒤 1942년에 목포에 행남사와 경상남도 밀양에 밀양제도소가 들어섰고, 그 다음해인 1943년에는 경기도 부천(富川)에 중앙도자기사와 대구에 계림요업사가 설립되었다. 앞의 두 공장에서는 생활도자기를 양산하기 시작했고, 계림요업에서는 변기를 만들었다. 이들 공장건설을 전후하여 남한에만 9개 공장이 건설되고 이북에는 7개 공장이 있어, 광복 전에는 전국에서 모두 16개의 도자기공장이 가동된 셈이 된다.

유리제조의 본격적인 효시는 1902년에 국립유리제조소가 건립되면서부터이다. 이 국립유리제조소는 러시아 기술자의 협력으로 병유리 생산시설을 갖춘 공장이었는데, 1904년 러일전쟁으로 별 효과 없이 폐쇄되었다. 그 뒤 1909년에 서울의 서대문에 유리공장을 건립했고, 1913년에는 왕족의 한 사람이 경성초자제조소를 건립하여 병유리와 램프를 생산했지만, 일본인의 자본력과 기술을 당하지 못하여 점차 쇠퇴해 갔다. 그 뒤에도 작은 규모의 유리공장이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서울 · 평양 · 부산 등 대도시에 건설되었다.

전국적으로 1931년에 6개 공장, 1934년에 19개 공장, 1938년에는 24개 공장으로 늘어났다. 근대식 시설을 갖추고 본격적인 병유리를 생산하기 시작한 것은 1939년에 설립된 제2일본초자주식회사이며 주로 맥주병을 생산하였고, 사이다병 · 됫병도 생산하였다. 그 후 광복되기까지 자동식과 수동식 시설을 겸비한 조선초자가 영등포에, 반자동화 시설을 갖춘 일광초자가 부산에 설립되었다. 그러나 모두 병유리에 치우치고, 시설은 근대화되었으나 운영은 활발하지 못하였다.

우리 나라의 내화물공업은 역사가 매우 짧으며, 광복 전에는 밀양 · 목포 · 인천 · 부산에 각각 1개씩 공장이 있어서 남석질 내화물을 생산하였다. 그 중 목포에 있는 내화물공장은 1938년 11월에 연간 생산량 5,000t 용량의 공장이었다. 시멘트가 우리 나라에서 처음 쓰이게 된 시기는 일본이 시멘트를 수출하기 시작한 1896년부터이고, 공식 통계로는 1904년에 시멘트와 석회 약 8,100t을 수입한 기록이 있어 이때부터 본격화되었을 것으로 본다.

1906년 4월에 일본계 회사가 연간 생산능력 6만t짜리 시멘트공장을 평양 승호리에 착공하여 1919년에 준공을 보았고, 이 해에 510t의 생산량을 올렸다. 1942년 삼척공장이 완공되기까지 162만t의 연간 생산능력을 갖는 공장이 건설되었다. 1908년부터 1914년까지는 1만t에서 약 3만t까지 수입하였고, 1915년부터 10년간은 매년 4만∼5만t의 시멘트를 중국 · 일본 · 영국 · 미국에서 수입, 사용하였으나, 1925년에 국내에서 10만t 이상을 생산하기에 이르러 국산으로 충당하게 되었다.

특히, 승호리공장 4호기 증설분은 압록강수력발전소에서 건설하는 수풍댐에 소요되는 시멘트를 충당하기 위해 승호리분공장을 평안북도 삭주군 수풍면에 세워 클링커로 수풍까지 옮겨 여기서 분쇄하여 사용하고, 수풍댐 공사가 완료된 1944년에 폐쇄하였다. 그리고 1944년의 생산실적은 약 100만t이며, 그때의 소비량은 약 76만t이었다. 일제강점기 공장 중 남한에 남은 것은 삼척시멘트공장뿐인데, 착공한 지 5년 4개월 만에 완공되고 연간 생산능력은 18만t인데, 최고로 약 8만4000t밖에 생산실적을 올리지 못한 채 광복을 맞게 되었다.

광복 이후의 요업

도자기류

광복과 더불어 일본인 기술자들이 모두 철수하자 국내 도자기공업은 일시 마비상태에 들어갔다. 그러나 국내 수요의 증가로 꾸준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은 결과 6 · 25전쟁까지 약 5년 동안에 생산량은 배로 증가하고 국내 크고 작은 공장 수가 68개 소에 달하였다. 6 · 25전쟁으로 한때 침체기가 있었으나, 1953년 전쟁이 끝날 무렵까지는 완전히 회복하여 1955년에는 당시 수입에만 의존해 오던 타일을 국내에서 처음으로 생산하기 시작하였고, 1957년에는 전기애자와 위생도기까지 국산화가 이루어짐으로써 과거에 식기류에 국한되었던 우리 나라 도자기공업은 차츰 다양성을 띠기 시작하였다.

더욱이 1963년에는 처음으로 홍콩과 타이에 약 13만 달러에 달하는 도자기와 타일을 수출하였다. 따라서 이 해에는 홍콩 전체 수입액의 1.1%, 그 다음해에는 3.3%를 각각 차지하게 되어 수출 전망이 밝게 인식됨으로써 도자기공업은 이를 계기로 수출산업으로서 주목을 끌게 되었다.

1965년도의 시설을 살펴보면, 도자기공장에서 불연속 가마(단가마)를 연속 가마인 터널가마로 바꾸어 열효율을 증대시켜 국제경쟁을 하게 되는 현대화가 이루어졌다. 1966년에는 도자기협동조합 산하에 51개의 공장이 있었는데, 이들이 보유하고 있는 터널가마 수는 32기, 단가마는 127기였다. 부산경질도기가 광복 후 대한도기사로 개칭하였고, 부산내화는 1961년 이화산업사에서 인수하여 1962년부터 타일을 만들기 시작하여, 1968년부터는 모자이크타일을 만들어 냈다.

특기할 만한 것은 정부에서 경상남도 마산에 요업센터를 건립하여 외장타일과 위생도기를 만들어 여기서 나오는 이익금으로 도자기시험소를 운영하여 도자기에 관한 연구를 수행하려고 기획하였다. 그러나 1969년에 요업센터가 준공되어 운영을 하였으나 너무 경영이 부진해서 1970년에 대림요업주식회사로 민영화되고 요업센터는 도자기시험소만 남게 되어 하는 수 없이 1980년 초에 상공부 산하의 도자기시험소로서 구로동으로 옮기게 되었다.

1976년에는 17개 기업체에서 터널가마 15기와 셔틀가마 5기를 신설 또는 증설한 것까지 합하여 단가마 45기로 10년 전에 비해 3분의 1로 줄었고 터널가마는 92기로 약 3배로 늘었으며, 새로이 셔틀가마가 18기나 등장하였다. 이 셔틀가마는 반연속 가마라 하여 열 절약은 단가마와 터널가마의 중간이고, 노벨티나 미술자기를 이 가마에서 굽는다. 이때까지는 이것은 2∼4.5㎥ 용량의 것으로 모두 수입에 의존했고, 대개는 액화석유가스(LPG)와 벙커C유를 사용하나, 1980년대에 들어서는 축로회사(築爐會社)가 많이 늘어 국산화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도자기공장이 많이 근대화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1980년까지의 증설 현황을 보면 5년간에 단가마가 21기로 반 이하로 줄고, 셔틀가마가 28기로 50% 늘어 터널가마는 26%가 늘었다. 여기서 새로이 전기가마가 13기 신설되었는데, 이것은 1978년에서 1979년 사이에 노벨티 수출이 62%나 급작스레 늘면서 이들 노벨티공장에서 쓰기 위해 건설된 것이다.

1989년 말 현재 도자기공장 수는 206개 소이고, 여주 · 이천 · 광주에만 존재하는 전승 도예공장이 174개 소이다. 후자에는 군소업체가 난립해 있어 이 지방에는 모두 500여 개소를 헤아린다고 한다. 그런데 이 지방에 전승 도예공장이 많은 것은 광주분원이 있던 유서 깊은 곳이고, 1718년(숙종 44) 광주 금사리에 분원이 있다가, 1752년(영조 28)에 역시 광주 분원리로 옮겨 1883년(고종 20)까지 분원이 165년이나 관요로 존속하던 곳이기 때문이다. 또 이 전승 도예를 살리고자 1963년 조소수(趙小守)를 비롯하여 유근형(柳根瀅) · 지순택(池順澤) 등 뜻있는 사람들이 모여 광주요를 설립해서 전통도자기 부흥에 이바지한 공이 크다고 본다.

도자기류의 생산실적은 부문별로 정확하게 파악하기 어려우므로 일부만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식기류는 1955년에 약 3만4000여 개, 1965년에 약 3만8000여 개에서 1976년에 약 1만7000t, 1985년에는 4만5000t에 달하였다. 타일류는 1955년에 약 16만㎡, 1965년에 약 60만㎡에서 1976년에 약 17만t, 1985년에는 약 27만t에 달하였다. 위생도기류는 1957년에 약 6만 개, 1970년에 약 35만 개, 1985년에는 약 2만t에 달하였다. 도자기 제품의 수출실적은 대체로 증가하는 추세에 있는데, 도자기류 제품의 연간 수출액은 1970년에 약 82만 달러, 1980년에 약 1억 달러에서 1988년에는 약 1억4000만 달러에 달하였다. 이 액수를 최고로 하여 1992년에는 5527만 달러로 줄고 1993년에는 4000만 달러를 수출했는데, 그 후에는 1998년 말까지 3000∼4000만 달러 대에서 오르내리고 있다. 수출을 주도해 왔던 종목은 식기제품으로 연 총 수출액의 70%(1990, 1993)까지 차지했으나 최근에는 50% 정도로 줄고, 대신 타일류가 건축 붐에 따라 40%까지 신장하고 있다.

그런데 수출 총액의 30%(1982)까지 차지했던 장식품(novelty) 수출이 줄어들기 시작하여 1990년까지는 17%로, 1993년부터는 한자리 숫자로 잔감하여 몰락의 길을 걷고 있다. 이 장식품은 도자기 4대 수출품목 중 가장 부가가치가 높은 것으로 임금이 쌀 때 일본에서 기술을 도입, 만들어서 수출까지 하게 되었으나 신제품을 개발하지 않고 임금도 오른 탓으로 위축되어 가고 있다. 외국에서는 국산 같은 미니 장식품이 아니라 큰 것을 만들어 부가가치를 더 올리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제조공정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설비의 자동화를 통한 조직과 인력을 최소화 · 정예화하고, 다품종 소량생산체제로의 전환 및 부가가치가 우수한 신제품의 연구개발 등이 필수적이다.

우리 나라는 도자기 제조원가의 25∼30%를 인건비가 차지하고 있어 경쟁력 악화의 가장 큰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1980년대 자동화율은 일부를 제외하고는 60%선으로, 선진국 90% 이상에 비하면 아직도 노동집약적 체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만 80%이상의 자동화율은 갖추어야 한다고 본다. 또한 선진국에서는 요업이 10∼20여 개사로 분업화되어 있으며, 우리 나라는 요업원료업체가 266개 소나 있지만 고급 점토 · 골회 · 채색료 등은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산업요로공업업체도 70여개 소나 있으나 고온용 대형 터널가마는 수입에 의존하고, 기계장치산업업체가 81개 소나 되지만 자동 성형장치는 대부분 수입에 의존한다.

도자기 제조업체 126개 소, 타일 위생도기제조업체 103개 소, 전사(轉寫)업체 23개 소가 있고, 전통도자기를 만드는 민속도자기공업업체가 여주 · 이천 · 광주에 집중되어 455개 소나 된다. 1980년경부터 학계에서는 전통요업을 기피하기 시작하여 1990년 후반부터는 거의 이에 관한 연구를 찾아볼 수 없고, 다만 요업시험원에서만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유리공업

광복이 되자 유리공업도 남북으로 나뉘었는데, 1947년에는 남한에만도 47개의 공장이 생겼으나, 이들 대부분은 재생유리공장이었다. 그러나 6 · 25전쟁으로 시설이 크게 파손되어 거의 중단상태에 들어갔으며, 정전 후 복구가 시작되어 1955년에는 소규모 공장을 합하여 41개 공장으로 늘어났는데, 그나마 근대식 공장설비를 갖춘 공장은 동양유리주식회사뿐이었다. 당시의 유리공장은 거의 폐유리에 소다회를 섞어서 용융하는 재생유리공장이었다. 그런 중에도 페니실린병과 같은 의료용 유리기구나 신호등 유리 제조기술을 개발하는 등 품종도 다양화되고 품질 향상에도 노력하고 있었다.

그런데 맥주 생산이 활발해지고 맥주병 수요가 늘어 사용된 병의 회수 이용만으로는 어려운 점이 많아지자, 부산에 있던 해남초자사가 1957년 5월 말에 영등포에 자동시설을 갖춘 병유리공장을 준공하였다. 그 뒤 대한유리주식회사로 개칭하여 병류생산을 활발히 시작하였다. 이보다 좀 늦게 1957년 9월 말에는 인천에 푸르콜(fourcault)식의 판유리공장이 벨기에와 기술합작으로 준공되었다. 이 공장이 바로 한국유리주식회사인데, 처음에는 생산능력 13만 상자로 시작하여 그 후부터는 자체 설계로 공장을 확장해 나아가게끔 기술 축적이 이루어졌다. 뒤이어 1959년에는 근대식 자동제병시설을 갖춘 대한유리주식회사(설립 당시 해남초자)의 준공을 보게 되어 우리 나라 유리공업계의 양대 지주가 되었다.

그 뒤 유리공업은 급속도로 발전하여 1963년 말에는 판유리공장 1개, 유리제품제조업체 55개, 유리제품가공업체 32개로, 총88개 업체로 늘어났다. 판유리공장이 정상 가동되고, 이어 대한유리주식회사가 정상가동함에 따라 전체 유리공장의 근대화가 촉진되었다. 또 안면도 규사가 개발되고 소다회가 국산화됨에 따라 유리공장도 급속히 발전하여 유리제품도 다양화되었고, 유리의 제조기술 · 제조시설도 국제수준화된 공장 수가 늘어났으며, 도자기와 함께 수출산업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1960년대 이후 주요 개발 상황을 보면 다음과 같다. 1959년 안전강화유리의 개발(한국유리주식회사), 1962년 한국유리공업협동조합의 창설, 1964년 섬유유리생산, 1965년 판유리의 생산자동화, 1967년 유리블록의 생산, 1978년 유리식기류 수입자유화, 1979년 광통신용 유리광섬유 개발, 1984년 유리광섬유 생산 등이 주요한 내용이다. 이 밖에도 크리스탈유리의 개발, 석영유리의 생산 개시, 인공 수정의 합성기술 개발과 생산의 개시 등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기술개발과 생산시설의 설치가 줄을 이었으며, 모래의 정제 및 인조 모래의 제조 등 괄목할 만한 발전을 보였다.

한국유리의 판유리공장은 자체의 기술로 생산을 확충해 오다가 1970년대에는 푸르콜식 인상법을 팬버논식으로 개조하여 품질을 높이고, 1986년에는 플로트(float)식으로 개체하면서 1989년 생산능력이 1,225만 상자로 늘어나 무려 100배의 신장률을 보이고 있다. 1995년에는 금강과 더불어 600만 상자가 증설되어 1998년 말 현재 한국유리는 1,825만 상자, 금강은 842만 상자의 생산능력을 보유하고 있다. 1988년의 판유리 수출은 5,150만 달러, 수입은 1.06억 달러로 수출의 약 2배를 수입하고 있다. 최근 경기 불황으로 수요가 줄어 국제통화기금(IMF)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다.

내화물

광복 후 1947년에 목포내화사를 조선내화사에서 인수하고 1957년에는 6,000t을 증설하였다. 1961년까지 4개 업체가 있었으나, 조선내화사의 독무대였다. 제1 · 2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이 착수된 1962∼1971년의 10년간은 성장을 위한 전환기라고 할 수 있다. 1962년에 내화물업체가 8개 업체로 늘어났다. 제3차 경제개발5개년계획 기간인 1970년대에 이르러서는 중화학공업이 급신장하고 포항종합제철주식회사가 생김으로써 수요량이 증가되어 조선내화사에서는 1974년 11월 포항종합제철주식회사에 3만5000 M/T규모의 부정형공장을 건설하기에 이르렀다. 1976년부터는 마그-크름의 염기성 내화물과 마그네시아클링커를 만들기 시작하였다.

1970년대는 특수내화물의 국내 생산과 제품 고급화에 총력을 경주한 개발기라고 할 수 있고, 1980년대는 수입개방에 대비하고 수출시장을 개척해야 할 국제경쟁력시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989년 현재 64개 내화물업체가 가동하고 있는데, 그 중 13개사가 터널가마를 설치하고 있다. 또 합작회사 1개 사를 비롯하여 기술도입업체도 8개 업체로 늘어났다. 선진국의 기술도입과 자체 기술개발로 일부 특수내화물인 전주내화물(電鑄耐火物)을 제외하고는 국내 생산으로 공급이 가능하게 되었다.

1980년대는 수입개방에 대비하여 수출시장을 개척한 국제경쟁력 시대라고 할 수 있고, 1990년대는 무한경쟁시대로 내화물의 선진국화를 위해 도약하고 있는 시대라고 볼 수 있다. 1998년 IMF로 인하여 14개 업체가 폐업하였으나 내화물업체 수는 50개 소이고, 생산능력 34만3000M/T, 생산실적 21만6000M/T으로 63.1%의 가동률을 나타냄으로써 생산사상 최고의 생산실적을 올린 1990년의 35만7000M/T에 비하면 60.63%의 저조함을 보여준다. 또한 같은 해의 수입액은 5916만 달러, 수출은 1328만 달러를 나타내고 있다. 선진국의 기술도입과 자체 기술개발로 일부 특수내화물(전주내화물 · 염기성 특수제품 일부 등)을 제외하고는 전부 국산으로 가능할 정도로 기술이 향상되어 있다.

시멘트공업

광복 이후의 요업 중에서 시멘트공업이 가장 활발한 발전을 보였다. 1942년에 건설된 삼척시멘트공장에서는 1만여t을 생산하다가 1956년 동양시멘트주식회사에서 인수하여 1959년에 제1차 대보수를 하였다. 1957년 9월에는 대한양회주식회사의 연간 생산량 24만t 규모의 문경공장이 설립되면서 1958년부터 25만t을 생산하게 되었다. 이 문경공장은 석회석의 질이 나빠 열효율이 좋지 못한 습식으로 된 제조공장인데, 현재까지 남아 있는 유일한 습식공법이다.

레폴킬른은 열효율이 좋기 때문에 1960년대 초까지 세계를 석권하였는데, 우리 나라도 1964년에 레폴킬른을 채택하였다. 그러나 이 방법은 반습식법이라 하여 가소성이 좋은 점토를 사용해서 성구(成球)를 해야 하는데, 공장 부근에서 좋은 점토를 구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게 되었다. 1964년 이후 서스펜션(suspension) 예열기를 쓴 새로운 기술을 도입하여 열효율이 좋으면서도 점토의 질에 크게 영향을 받지 않는 시멘트를 개발하였다. 유니온시멘트주식회사가 우리 나라에서는 유일한 백색시멘트를 생산하여 타일과 기타의 접착제로 사용하고 있고, 한국슬래그시멘트주식회사는 폐기물로 나오는 슬래그를 클링커와 섞어 이른바 혼합시멘트를 만들고 있다.

시멘트의 수입은 1970년부터 없어지고, 수출은 1964년부터 시작된다. 1987년도 세계의 시멘트 생산량은 약 10억5000만t이고, 우리 나라는 2,566만t을 생산하여 전세계 생산량의 2.44%를 차지, 세계 6위의 시멘트 생산국이 되었다. 그리고 1인당 시멘트 소비량은 541㎏으로 세계에서 25위에 머물고 있는 것으로 보아 증산할 여지는 충분히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대체로 포틀랜드시멘트를 주로 만들고 조강시멘트도 약간 만든 때가 있으나 수요량이 적어 현재는 모두 포틀랜드시멘트를 만들고 있으며, 유니온시멘트주식회사만이 백색시멘트와 알루미나시멘트를 만들기 시작하였다.

1997년까지 제조공정상의 큰 변화는 없었으나 열효율 증진을 위하여 서스펜션 예열기를 4단에서 5단으로 개조하였고, 쌍용양회에서는 생산능력을 1,500만여t으로 단위공장으로서는 세계 제1위인 큰 공장으로 성장하였다. 동양시멘트와 성심양회도 생산능력을 1,000만{{#245}}으로 끌어올리는 등 증산에 힘쓴 결과 1999년 5월에는 생산능력 6,200만t으로 세계 5위이며, 1인당 시멘트 소비량이 1,400㎏에 이르렀다.

건설경기에 힘입어 시멘트 수요는 지속적으로 증가되어 과감한 신증설계획을 수립 · 추진하여, 1990년에 4,000만t, 1993년에 5,000만t, 1998년에 6,186만t의 생산능력을 보유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증설에도 불구하고 급증하는 수요에 못 이겨 1991년에 708만t, 1995년에 208만t, 1997년에는 299만t을 수입하였다. 1998년에는 IMF 한파로 건설경기가 급격히 줄어 공급 과잉현상이 일어나 1999년에는 400여 만t을 수출하였다.

벽돌 · 기와

개항 이후 일제강점기에 이르러서는 벽돌벽이 쓰이기도 하였으나 서구식 붉은 벽돌이 주로 쓰였다. 이 붉은색은 산화철이 많은 점토와 약간의 모래를 섞어 산화염으로 소성하면 된다. 재래식 흑회색 벽돌은 기와와 마찬가지로 환원염으로 소성하여 마무리 소성 때 그을음을 먹이면 된다. 벽돌의 크기는 10.9×22.7×6㎝를 표준으로 삼았고, 줄눈 나비는 가로가 7.6㎜, 세로를 9.1㎜로 하였다. 그 품종도 과소벽돌(過燒甓乭) · 소벽돌 · 보통 벽돌 등으로 대별하고 필요에 따라 각각 1 · 2등급으로 나누고 있다. 1930년부터 구워 만든 벽돌의 수요 증가에 따라 시멘트 기와와 벽돌이 일반용으로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시멘트벽돌은 모두 미장바름하는 벽면에 쓰였으며 치장쌓기에는 쓰이지 않았다.

1913년에 벽돌생산은 932만 장, 1920년에는 5,528만 장이고, 1937년에 1억3400만 장을 생산하였다. 그 당시 50여 개의 벽돌공장이 있었고, 당시의 부평연와공장과 한국벽돌공장이 광복 후까지 남아 있었으나, 불행히도 광복 후 얼마 안 가서 이들마저 폐업상태에 이르렀다. 광복 후에는 벽돌의 치수가 점차 작아지고, 1950년대에는 규격을 21×10×6㎝로 정했으며, 품질등급도 1 · 2급에 각각 1 · 2호로 4등급으로 되었다. 1950년대부터 시멘트블록이 벽돌이나 시멘트벽돌보다 보온성이 좋기 때문에 많이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1970년대에는 생산비 절감을 도모하고 벽돌과 블록을 혼용할 수 있는 치수로 만들게 됨으로써 19×9×5.7㎝를 장려형이라는 이름으로 건설부에서 제정하였다.

벽돌의 생산량은 1947년에 100여만 장, 1950년에 2,500만 장, 1965년에 1억9071만 장, 1980년에 3억500만 장, 1985년에 약 6억 장에서 1988년에는 11억8000만 장으로 증가하였다. 특히, 1988년에는 건축경기가 호황을 이루어 1985년에 비해 무려 배나 성장한 셈이 된다. 벽돌은 건축경기에 좌우되어 경기가 좋으면 벽돌의 매매가 활발해져 이익이 남지만 불경기 때는 이와 반대현상이 일어난다.

소성가마는 호프만식 고리가마가 열효율이 좋아서 광복 전까지 대종을 이루었으나, 광복 후부터 터널가마가 도입됨에 따라 이 방법이 널리 이용되었다. 1988년에는 120개의 연와공장이 가동되고 있었는데, 1988년도의 호황에 발맞추어 1989년에는 11개 공장이 건설되었다. 1983년에서 1992년까지 10년간에 걸친 벽돌 호경기로 1983년 68개 소의 점토벽돌공장이 1992년에는 146개 소로 급증하였다. 뿐만 아니라 설비 시설면에서도 호프만 가마에서 이전처럼 연간 400만 장 정도밖에 생산하지 못하다가 터널가마와 자동화를 도입하여 연간 3000만 장 이상 생산하는 큰 공장들이 10여개 소가 되어 IMF 전인 1997년에는 13억700만 장을 생산하기에 이르렀다. 업체 수는 137개 소로 줄고, 나머지 공장들도 반자동화되어 총 생산설비 능력이 일약 5배 이상으로 격증하였다. 거기에 IMF가 겹쳐 1998년 말에는 대부분의 공장들이 휴 · 폐업을 하고, 불과 15개 소의 공장만이 겨우 축소 가동을 하였다. 1999년에 가동된 공장도 30여개 소 정도이다.

새 요업재료

전자공업은 현대 산업사회의 기간산업으로 그 규모나 기술혁신이 하루가 다르게 발전을 거듭하여 모든 산업 분야에 걸쳐 급격히 파급되고 있다. 1976년 이전 우리 나라 전자요업재료공업은 거의 없던 상태였고, 세라믹콘덴서 · 탄소박막저항기 · 페라이트 등 주요 부품은 원자재의 도입으로 노동집약적인 성격을 지닌 가공조립 위주의 소자본 중소기업형으로 발전하였다. 또한, 가전제품을 조립생산하고 있는 국내 대기업체나 조립업체에서도 부품원자재의 국산화 필요성을 인식하지 못한 채 값싼 노동력으로 국제경쟁에 대처하였다.

그 뒤 흑백텔레비전용 브라운관을 기술도입과 합자로 생산하기에 이르렀고, 탄소피막저항기용 소재 · 페라이트도 본격적으로 생산하였다. 기억연산소자 · 자심(磁心) 등에 쓰이는 연자성용(軟磁性用) 원자재인 산화철은 일본에서 전량 도입되고 있었으나, 1982년 삼화전자주식회사의 천안공장에서 월간 200M/T의 산화철정제공장이 가동을 시작하여 국산화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1988년까지 첨단 분야 대부분의 품목과 자기헤드용 고밀도 페라이트재료 등의 고가품은 수입하고 있는 실정이다. 정밀요업재료 및 부품의 국내 수요는 소자형태로 약 5억8300만 달러, 부품형태로 약 6억7140만 달러로 막대한 양이 있으나 페라이트 등 한두 품목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부품형태로, 일부 품목은 소자형태, 즉 제품형태로 도입하고 있다.

1990년대 수출산업으로 육성,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중화학공업 분야 · 자동차 · 전자산업과의 관련 품목 개발과 다음 세대 공업재료로서의 기반 조성을 위하여 기초연구에 주력해야 할 것이다. 다음 세대를 위한 새 소재 창출 가능성이 높은 단결정 · 무기질섬유 · 복합재료에 대한 연구가 촉진되어야 하고, 전기 · 전자공업 관련 부품의 수입이 기술을 선진국에 더욱 예속시키고 무역적자를 심화시키기 때문에 조립업체의 수요내용을 파악하여 개발 기간을 단축시켜야 된다. 전자부품의 발전 추세는 소형화 · 집적화를 겨냥하고 있으므로 이를 위한 고순도물질의 합성방법 · 성형방법 · 가공방법 등 기초연구가 절실하며, 노동집약에서 기술집약으로의 전환 등을 위한 정부의 투자 및 학계를 중심으로 한 연구가 시급하다. 또한, 대기업 규모보다는 중소기업 규모로 전문화된 다양한 재료 및 소재개발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새 요업재료는 전자산업의 고도화와 환경문제에 따른 수요 증가로 1990∼2000년간 연평균 14.2%의 성장을 보였다. 용도별로는 전자용 세라믹이 수요의 대부분을 차지할 것으로 보이나 구조용 세라믹과 광 및 바이오세라믹 등 첨단제품의 증가세도 두드러졌다. 자성체 세라믹은 페라이트 코어를 중심으로 성장해 왔으나, 최근에는 칩인덕터, 칩비드, EMI필터 등 칩형 부품의 개발 및 시장 참여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압전 분야는 원재료부터 최종 제품까지 모든 공정이 대부분 국산화되어 각각의 업체들마다 고유의 노하우를 확립하고 있다. 반도체 세라믹은 서미스터를 중심으로 칩화되는 경향이 커지고 있으며, 고성능 원재료 개발 등의 핵심기술 확보가 요구된다. 특히 이 분야의 업체는 IMF 이후 흡수합병과 대기업의 분사가 가장 많이 이루어지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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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조합25년사』(한국유리공업협동조합, 1987)
『분청사기연구』(강경숙, 일지사, 1986)
『한국백자도요지』(정양모,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6)
『한국미술사』(대한민국예술원,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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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기와』(동이문화연구원, 동산문화사, 1976)
『한국의 시멘트산업』(한국양회공업협회, 1974)
『고려도기와 이조도기』(고유섭, 성진문화사, 1971)
『고려청자』(고유섭, 을유문화사, 1954)
「도자기」(최순우, 『한국고미술』, 문화재관리국, 1974)
「백제와당의 체계적분류」(박용전, 『백제문화』 9, 백제문화연구소, 1976)
「통일신라시대의 와전연구」(김성구, 『고고미술』 162·163, 1984)
주석
주1

고체에 열을 가했을 때 액체로 되는 현상.    우리말샘

주2

잿빛을 띤, 거칠게 만든 토기. 중국에서 신석기 시대부터 청동기 시대에 걸쳐 썼다.    우리말샘

주3

초기 철기 시대에서 원삼국 시대에 이르기까지 만들어진 토기. 겉면을 무늬가 새겨진 두들개로 두드려 무늬를 넣은 것이 대부분이나 무늬가 없는 것도 있다.    우리말샘

주4

벽돌로 쌓아 만든 옛 무덤의 현실(玄室) 벽.    우리말샘

주5

예전에 왕궁, 사찰, 왕릉 따위의 벽이나 바닥을 장식하는 데 쓰던 벽돌.    우리말샘

주6

고분의 입구에서 시체를 안치한 방까지 이르는 길.    우리말샘

주7

처마 끝에 놓는 수막새와 암막새를 통틀어 이르는 말.    우리말샘

주8

새겨서 나타낸 무늬.    우리말샘

주9

도자기를 만들 때에, 도장 따위의 도구로 눌러 찍은 무늬.    우리말샘

주10

접시에 높은 굽을 붙인, 고대 식기의 하나. 동남아시아에서는 이른 시기부터 사용되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김해ㆍ경주 등지에서 많이 발굴된다.    우리말샘

주11

고온에 잘 견디는 점토로 만든 원기둥꼴 그릇. 도자기를 구울 때 이것을 도자기 위에 씌워서 불길이 도자기에 직접 닿지 않게 하고 도자기에 재가 앉는 것을 방지한다. 비용이 많이 들어서 주로 상품(上品)과 중품(中品)의 도자기 제작에 사용되었다.    우리말샘

주12

그릇 겉면에 입힌 백토 켜를 긁어 냈을 때 긁히지 아니한 백토 선으로 이루어지는 무늬.    우리말샘

주13

백토로 입혀진 잿빛 바탕 그릇의 겉면에 무늬를 그리고 그 무늬 부분을 긁어서 만든 잿빛 수평선 바탕 무늬.    우리말샘

주14

철분이 섞인 채색 물감으로 그린 무늬.    우리말샘

주15

귀얄로 낸 무늬.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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